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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께서 주신 영을 추구하는 삶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10 조회수741 추천수7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주신 영을 추구하는 삶> ... 윤경재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 24-26)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을 세 가지 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육적인 면과 정신 곧 마음과 영적인 면 이렇게 세 가지 속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신약에서도 인간을 육(사르크스), 정신(프쉬케), 영(프네우마)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속성에게 어떤 가치의 차별을 둔 것은 아닙니다. 육도 정신도, 영도 모두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며 다만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반응하는 성질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은 인간의 신체외적인 구조와 생물적인 요소를 대표하고 있으며 정신은 감정과 생각과 이성과 의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知, 情, 意라고 표현합니다. 영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적인 요소이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 갈 능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영과 정신의 구별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정신의 위대함을 강조하다 보면 마치 정신이 영의 수준에 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많은 사상과 철학에서는 이 영(프네우마)을 영혼이라고 말하여 마치 정신세계의 일부 특징인 것처럼 표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언어 습관은 정신과 영을 온전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쓰고 있습니다. 英語에서도 영과 영혼을 혼동하여 써 왔습니다. 다만 성경 번역에서 “거룩한 영(하기온 프네우마)”을 대문자 Soul 로 달리 적었을 뿐입니다.


  영은 분명히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을 부어 주셨기에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의 위대성을 자랑할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영을 부여 받지 못한다면 그는 영적인 수준에까지는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 영역을 혼동하여 정신만으로도 영의 영역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 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모시는 종교를 지니고 있지 않은 많은 사상가나 철학자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또 하느님을 모르는 종교인들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런 교육을 받아 와서 하느님께서 주신 영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 천주교교인들만이라도 이런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정신적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의 능력만으로 영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세례와 영적인 생활을 통해 선물로 받고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영을 받고 살았지만 제대로 그 영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강생하시기로 하시고 외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새로운 영을 받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으면 이 정신과 영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의 정신(프쉬케)을 사랑(필레오)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코스모스)에서 자기의 정신(프쉬케)을 미워(미세오)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조에 아이오니온)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할 것이다.”


  여기서 프쉬케를 목숨이라고 해석한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프쉬케로 인간의 목숨을 대표한 것입니다. 다만 저는 묵상의 차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영적 생명이라고 볼 때 프쉬케는 영적 생명에 이르지 못한 정신적인 면이라고 알아듣는 것이 더 분명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정신적인 면이 전부라는 생각을 죽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알아듣자는 것입니다. 또 그런 방향으로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도 영적인 수준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정신적인 면에서 다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8월 4일에 묵상한 글 ‘두려움과 체면과 영의 목소리’가 이런 의도로 묵상한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프쉬케를 정신적인 면이라고 놓고 보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뜻이 좀 더 실감 있게 다가 올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목숨이라고 한다면 우리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너무 거창하고 지고한 수준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어렵고 실천하기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정신을 뜻하는 것이라고 조금 낮추어 보면 우리도 그 일만큼은 실천할 수 있다하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알아 듣기 쉽게 됩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을 최고로 여기고 사랑하는 자세를 바꾸고, 주님께서 부어주신 영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영의 영역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자는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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