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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착한 사마리아 사람 <완 결>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10 조회수711 추천수2 반대(0) 신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고통의 복음에 속합니다.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곁에 멈추어 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한 (마음이 움직이는) 개인 누구나에게 적용됩니다.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비심을 강조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일체에서 이 자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멈추어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결국,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고통 속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가져다 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성질의 고통이든간에 될 수 있는대로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로 '나' 를 준다고, 이 '나' 를 타인에게 열어 놓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웃인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그 자체로 깊은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인간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자기 이웃과 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고통 앞에서 수동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특별히 능동적이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는 예언자의 말씀대로 당신 사명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그 본질적인 내용을 통하여 저 최후의 심판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것이다" 이 최후의 심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조금도 애매한 데가 없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개인 누구에게나 그가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 이웃의 고통을 보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멈추어 서서" 그 고통에 대하여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은 고통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은 사랑을 방출하기 위함이요, 이 사랑(자비) 안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개인 각자에게 완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이 일단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 고통을 향하여 열리어 있는 이상,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 고통 중의인간 안에 현존하여 계십니다. 이는 마치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도록 " 부르심을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요,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또한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신다고 갈파하였습니다. (사목헌장 22항)
 
십자가 위에는 만민이 사랑 안에서 구원적 의미와 고통에 대한 물음에 대한 타당한 해답을 발견하도록 그 모든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신 구원자 그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 서 계셨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우리는 현대인들의 십자가 곁에 머무는 바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구원에 이르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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