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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12 조회수747 추천수7 반대(0) 신고
 
나는 어떤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얼굴은 자신의 인격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얼굴은 그만큼 신체 중에 중요한 부분이다. 얼굴을 보는 순간, 좀 살았다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상태가 어떻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물론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바로 화가 났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그대로 들어난다.
 
역으로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떠나가든 말든 모든 것이 자신의 것 인양 다 표현을 해 버린다. 이럴 때 저 사람은 왜 얼굴값도 못하는 것이야 하고 핀잔을 주게 된다.
 
그럼으로 우린 어떤 방법으로든지 인격을 쌓든 수양을 하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남성들은 그렇다 치고 여성들의 경우 답답하거나 집안에 뭔가가 잘 안 풀릴 때 찾아가는 곳이 있다. 용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용하다는 사람들 어떤가? 참으로 용한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용한 것이 아니라,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만 해도, 아! 족집게야 하고 감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긴장하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연인문제, 사업문제, 생노병사, 자녀문제를 건드리면 거기에 해당 안 되는 사람들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얼굴에 다 쓰여 있는 데로 슬슬 질문을 던지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큰 소리로 겁을 팍팍 주면 줄수록 쉽게 그 답을 잘 하기에 점쟁이들은 더 강도를 높여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딴 살림 차리고 있구만” 하면 될 것을, “어허 서방이라는 놈이 능력은 없으면서 계집을 얻어” 약을 살살 올린다. 약 오르는데 궁금하지 않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러니 얼굴을 제대로 가져라. 온전한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점쟁이 찾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얼굴값을 제대로 하도록 하자.
    

얼굴도 나이에 따라 책임의 양이 정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어린아이 때는 책임이 없어서 그런가 몰라도 얼굴이 뽀얀 한 것이, 아마도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얼굴일 것이다.
 
그러다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연령인 40때 초반에서 50때 중반에 이르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면서 색깔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러다가 노인이 되면 주름은 있어도 편안한 모습으로 가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기 전엔 자신이 왔던 어린 아이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잘 살았을 때의 모습이고, 그렇지 못했을 땐 여러모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땐 남이 어째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싫어하게 됨이 문제이다. 그러니 덕을 닦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얼굴이 좋은 얼굴이요 깨달음을 지닌 얼굴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탈출기 34장 30절에 보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습을 보면 이렇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보면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 2) 두 분의 모습을 뵈며 느껴지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은 얼굴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닮은 사람의 모습은 흰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이 아닌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것이다. 눈이나 대머리가 아닌 그냥 얼굴에서의 광채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님의 얼굴에선 광채가 빛난 것이다. 우린 얼굴에선 광채를 못 낸다 해도 적어도 눈에서 만이라도 광채를 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린 성인들의 삶 안에서, “성인께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꿈에서라도 뵌 적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 그때마다 우리가 듣는 답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느님은 너무 강렬한 분이시라 하느님을 뵙는 순간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이야기를 들어왔다. 실제로 그렇다고 본다. 하느님은 순수 완전 결정의 모습이시기에 그분을 뵙는 순간 빨려 들거나 타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하느님을 뵙지는 못한다 해도 이냐시오 성인처럼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앉고 오시는 환시라도 볼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한다. 은총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시를 볼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때 하느님은 우리가 죽기 전에 여러 양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 당신 체험을 드러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자신의 얼굴값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사람은 얼굴에 광채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리라. 내가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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