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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 21일 야곱의 우물- 마태 19, 23-30 묵상/ 그분의 이름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1 조회수518 추천수9 반대(0) 신고

그분의 이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태 19,23-­30)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사범대학을 다니던 20대에 나는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가톨릭 학교는 내가 기대하는 ‘좋은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배운 바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성이 잘된 선배들한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분홍빛 그리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톨릭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서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쉬는 교우가 많았고, 비신자도 많았으며, 학교와 교회(법인)를 자기 안위를 위한 쟁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톨릭 학교 안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면 즐거워야 할 터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그들도 교회의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곳에 왔는데, 왜 교회 이야기를 하면 모두 불편해할까?
 
나에 대한 경계와 따돌림의 시선이 조금씩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가톨릭계 교사들의 기본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참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요즈음, 그 흐름 안에서 살아온 터라 나도 모르게 변해 있을 내 모습, 새로이 임용되어 오는 후배 교사들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그대로, 그들이 나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선배 교사는 아닐까?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께 먹칠을 하지는 않는지 조용히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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