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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샬롬묵상]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1 조회수741 추천수2 반대(0) 신고
 


8월21일 야고보 아저씨의 샬롬묵상-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8월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19,23-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재속 삼회 회원들과 성지에 모여서 월례회도 하고, 수사신부님과 미사도 드리고, 강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날 신부님은 프란치스코 사부님처럼 바싹 쪼그리고 앉으셔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강론을 하셨는데 그 강론의 요지는 ‘느작불’이었습니다. 우리말에 없고, 영어 단어에도 없는 ‘느작불’은 ‘느리고, 작고, 불편하게’를 줄인 말로 우리들의 삶을 그렇게 바꾸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은 들기는 합니다.

 

   나는 어려서 이십 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읍내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새벽 여섯 시에 집에서 떠나야 늦지 않게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여섯 시에 우리를 학교에 보내려면 어머니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보리밥을 두 번 앉혀서 아침 밥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지으시고, 정신없이 밥을 먹는 자식에게 할머니와 어머니는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라.”하고 지켜 앉아 당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때는 소화제도 흔치 않고, 위가 약하기 때문에 위경련은 왜 그렇게 자주 나는지 겁이 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개를 두 개만 넘으면 벌써 배가 고파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정말 밥 한 공기 가지고 양이 차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보리밥일지언정 양껏 먹여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은 조금을 먹더라도 밥 한 수저에 30번은 씹어서 천천히 먹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을 받습니다. 이제는 정말 여유를 가지고 아주 천천히 먹을 수 있는 때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빨리빨리 많이 많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삽니다. 그래서 무조건 빨리 많이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가 봅니다. “빨리 먹는 밥, 똥 눌 때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빨리 해치워버리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잘 체험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도 아주 차근차근하게 선행을 쌓고 하늘나라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빨리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도, 복음 말씀도 급하게 받아들이고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은 싫어하고, 참고 기다릴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답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정성을 다하여 꼼꼼하게 되짚어 가면서 살아야 하겠지요.


   어려서는 무조건 큰 것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집도 크고, 논밭도 많고, 돈도 많고, 키도 아주 크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확대하고 거대한 것을 지향하는 나의 삶은 작은 것을 볼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장 작은 사람이’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도 빈말처럼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일본인들의 문화를 ‘축소 지향적’(縮小 指向的)문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축소지향적 일본인’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일본 사람들의 문화 모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아져야 한다는 정신과 문화가 일본 사람들은 몸에 배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처럼 우리도 작고 겸손하게 의도적으로 문화에 정착하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자꾸만 적어지고 작아지는 운동을 전개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자존심과 자만심을 버리고 바늘귀를 빠져나가려는 작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세상은 점점 편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점점 우리를 편하게 만들고 있지만 당연히 편한 것이 좋지요. 그러나 너무 편함을 추구하다보면 우리의 삶이 점점 기형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오래 몰고 다니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근육이 점점 물러지고 힘이 없어집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 눈도 제일 먼저 나빠지고 성욕도 약해지고, 심장도 약해지고 면역력도 떨어지고, 혈액순환도 나빠지고 모든 것이 장애를 받게 됩니다. 걸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마나 전부 차를 타고 다니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매연도 많아지고, 교통  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세상의 순환은 자꾸만 다르게 돌아갑니다. 일회용품도 범람해서 사람들의 편함을 추구하는 것에 치우쳐 세상은 자꾸만 편해집니다. 이제 편해지는 것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연과 적응하고, 세상과 적응하여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가난하게 살며, 불편을 감수하고 하느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작고, 느리고, 불편하게 살았지만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활발하고 빠르며, 가장 큰 사람이 되며, 가장 편안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꼴찌이지만 저 세상에서는 가장 앞선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비의 주님, 저희가 너무 빨리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자 혈안이 되어 살았나이다. 매일 당신의 깊은 사랑에 자신을 내 맡기지 못하고 저희의 욕심으로 너무 크게 살았나이다. 갖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았나이다. 매일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닮고자 하면서도 육체적인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여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였나이다. 이제 명심하여 당신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평화와 사랑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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