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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일강론]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 배광하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6 조회수796 추천수8 반대(0) 신고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보편종교


가톨릭이란 ‘공번된’ ‘보편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열린 종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시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장애자이든, 여자이든, 죄인이든, 세리이든 그들 모두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그것도 모든 계층, 성별, 나이, 종교 등의 엄격한 차별이 있었던 때에 모두가 하나 되기를 열망하시며 포용의 참 평화를 사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 스승 예수님의 정신을 꼭 닮으려 노력하였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200년 전 그 같은 놀라운 보편된 가톨릭 신앙의 정신이 양반 선비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분들은 분명히 가톨릭 정신을 알았고 그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양반, 중인, 상놈, 노비, 천민, 백정의 계급이 뚜렷했던 그 시대에 그 모든 계급의 벽을 부수어 버리고 함께 평등의 삶을 사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호남 교회사 연구소 소장이신 김진소 신부님은 그때의 교우들 감격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천주님의 신비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감격에 자지러졌다. 이 깨지기 쉽고 허약한 뚝배기 같은 인간, 훅 불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 허무한 인간, 정승집 개만도 못한 인간이 천주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의 형제라니, 이제 죽어도 무슨 한이 있겠는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광명의 빛이 이 땅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신앙의 인품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내려오니 그토록 빠른 시간에 복음이 이 땅에 선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진 것처럼, 동방의 한국 땅에도 전해진 것입니다. 보편된, 가톨릭 그 이름으로 말입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 66, 18)

걱정의 소리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하였습니다. 2000년 전, 200년 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에도 가톨릭, 보편 신앙이 가능했었는데, 그 모든 차별이 없어진 오늘날 우리가 보편된 가톨릭 이름 값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의 삶이 가엾어 지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이고, 자신들과 이해가 맞는 교우들과 신앙이 아닌 친목 모임으로 변절되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된 바리사이 종교가 되어 나가는 행태에 걱정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본당은 본당대로 자기 본당에 안주하려 들고, 교구는 교구대로 자신의 교구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워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오늘날 개신교의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통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 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 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 헌금자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하였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 말은 비단 개신교 교단에만 국한된 탄식과 비난이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도 어느 사이엔가 비슷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행하였던 자신들만의 성역을 쌓는 파렴치한 일들을 오늘 우리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의 신앙의 삶에 물어 보아야할 것입니다. 전통 신앙이라고 자부한다면 그 전통에 걸맞은 너그러움과 보편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미리 시작하였다고 모두 구원의 문에 입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구원을 위한 끊임없는 받아들임, 좁은 문으로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오늘 예수님 진노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 27)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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