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7 조회수1,110 추천수15 반대(0) 신고
 
2007년 8월 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Blind fools, which is greater, the gold,
or the temple that made the gold sacred?

(MT.23.17)

 
제1독서 테살로니카 1서 1,1-5.8ㄴ-10
복음 마태오 23,13-22
 
 
어제 저녁미사 때였습니다. 주일 저녁미사는 청년들 미사로써 청년 밴드 팀이 반주하면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미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저는 미사의 어느 한 순간이 되면, 긴장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벌써 한 달째 틀리고 있거든요. 이 부분은 바로 ‘신앙의 신비여’입니다. 저는 맞게 한다고 하는데, 미사가 끝나고 나서는 반주자가 항상 말합니다.

“신부님, 오늘도 틀리셨어요.”

이러한 말을 듣다보니,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왜 틀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하긴 ‘신앙의 신비여’ 버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린이미사, 중고등부미사, 성인미사, 국악미사, 그리고 청년미사까지... ‘신앙의 신비여’의 음이 다르다보니 이렇게 틀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달째 틀릴 수가 있을까요?

어제 저녁미사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기 위해 사제관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신앙의 신비여’에 대한 말이 나왔지요. 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음을 노래 불렀습니다. 아니랍니다. 저는 이 음이 맞다고 계속해서 우겼지요. 그리고 이 ‘신앙의 신비여’가 나오는 음반을 틀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음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단지 긴장을 해서 음이 계속 틀리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한 달 동안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음반을 틀어 보면서 연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이며, 어리석은 저의 모습인 것이지요. 결국은 신자들에게 놀림감만 될 뿐인데,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꾸짖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세부조항에만 목숨 걸고서 지키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예수님은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처럼 따끔한 충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까요?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있다는 착각에, 자신들의 말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잊고, 나 중심으로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할 때 또 한 명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결국 한달 동안 성가를 틀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고집 부려서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남들의 말도 좀 들읍시다.




자기만의 프레임을 깨라(최인철, ‘프레임’ 중에서)



최근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아주 재치 있게 보여 주는 실험 하나를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심릭학과에서 실시했다.

두 명을 한 조로 짝 지워 한 명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고 다른 한 명은 그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는 실험이었다. 이때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곡명을 알려줄 수 없고 입으로 흥얼거릴 수도 없다. 오로지 손가락만으로 노랫가락을 표현하게 했다. 노랫가락 연주가 끝나면 청중격인 참여자는 노래 제목을 적고,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한 노래 제목을 상대방이 알아맞힐 확률을 적도록 했다.

연주자의 기대치와 청중의 정확도는 얼마나 맞아떨어질까?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주자들은 청중이 자신의 손가락 연주를 듣고 노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이 최소한 50%는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청중이 제목을 맞힌 비율은 겨우 2.5%뿐이었다. 연주자의 손가락 연주가 잘못된 것일까?

이제 입장을 바꿔 청중이 되어 보자. 당신에겐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어떤 멜로디나 연주의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저 '탁탁' 책상 치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도 연주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경험했던 그 환상적인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우리의 의사 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것은 오직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한 것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지극히 애매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무감각과 무능력, 배려 없음을 탓한다.

우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라며 상대방을 추궁하지만 실상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들릴 수밖에 없다.
 
 
 
You blind ones, which is greater, the gift,
or the altar that makes the gift sacred?

(Mt.23.19)
 
 
 Heart to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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