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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지요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8 조회수744 추천수10 반대(0) 신고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지요 
                                            또 한 해의 여름방학을 보내고
        



<1>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자.' 이것이 내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내 삶의 중요 가치이며, 목표다. 물론 평범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종교적 신념도 깃들여 있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산다. 이 세상에 슬픔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고자 하는 마음,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오늘도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은 더 기쁘게(또는 알차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슬픔을 아는 사람이 기쁨을 아는 법이라는 말도 있을 법하다. 이런저런 슬픔과 상처들을 가슴 깊이 안고서도(또는 빈약한 조건 속에서도),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나 역시 오늘도 그런 모습을 지향한다. 제법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내 인생 역정에는 눈물도 많다. 돌아보면 실패와 좌절, 불행과 고통, 회한과 슬픔의 이랑들이 어지간히도 무성한 듯싶다. 온전한 과거완료형도 아니다. 오늘에까지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으니, 부분적으로는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거기다가 무시로 새롭게 생겨나는 슬픔과 고통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늘 기쁘고 활기차게 살려고 노력한다. 또 언제 무슨 불행과 고통이 내게 닥쳐올지 모른다는 상존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그 모든 일을 하늘에 의탁하는 마음으로 산다. 내게 오는 기쁨도, 슬픔도, 내 삶 안의 모든 일들을 하느님의 안배로 생각하며 살고 또 살려는 것은, 신앙인의 최고 덕목 중의 하나인 '순명적 자세'를 배우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지난 7월 31일 고양시 '호수공원' 풍경을 보시며 감탄하시는 어머니. 올해 연세 84세시다.  
ⓒ 지요하

나는 신의 '초대'에 의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면 하느님을 알게 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 모두는 하나같이 신의 초대에 의해 이 세상에 왔지만, 거기에다가 나에게는 초대장이 하나 더 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하여 늘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

예수 그리스도님은 "하늘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오 복음 22. 1-14)고 하셨다. 나는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이미 그 잔치에 참석해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매일같이 새롭게 그 잔치에 참석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 잔치에 기꺼이, 또 정중히 참석하기 위해서 늘 예복을 입는다. 나를 초대하신 그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고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을 냉혹하게 대한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라고 묻고, 하인들에게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라고 명한다.

그 얘기를 들려주며 예수 그리스도님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마태오 복음의 이 대목에서 듣는 '혼인 잔치'란 바로 '신앙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잔치의 예복'은 '기쁘게 사는 생활'을 뜻한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왕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으니 기꺼이 참석해야 하고, 이왕 참석을 하려면 정중히 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

이왕 하느님을 믿으며 살기로 했으니, 착실히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 수많은 슬픔 가운데서도, 믿음에서 오는 '희망'을 안고 정말 기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삶의 무거운 멍에로 느껴지는 일들,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슬픔과 고통들도 '은총의 십자가'로 가슴에 '안을' 수 있다. '예복/기쁨'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어떤 고난도, 그것을 내 구원의 십자가로 메고 가는(안고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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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20일 사돈어른들과 추어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 지요하

며칠 전 근처에서 사시는 사돈어른들을 모시고 또 한번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외국에 나가 사는 아들 며느리를 벌써 12년이 넘도록 상면도 하지 못하며, 두 손자를 데리고 사시는 노인들이다. '어쩔 수 없이' 그 노인들께도 종종 신경을 쓰고 챙겨드리며 산다.

어렸을 때 부모와 생이별을 한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거나 되어 가고 있다. 큰 생질은 자력으로 공업전문대학을 나와 경기도 평택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녀석은 고3이 되어 대입 준비에 바쁘다. 미국에서 사는 아버지가 '손을 자르기 전에는 고치지 못한다'는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연거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여파로, 현재 그 사돈댁은 큰 생질이 월급을 타서 보내주는 돈으로 살고 있다.

큰 생질이 타지에서 대학에 다닐 때 없는 살림에도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준 나로서는, 2년제 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하는 생질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초등학교 5년 시절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어렵게 자랐는데도 구김살 없이 명랑 쾌활하게 생활하는 생질이 고맙기도 하면서, 그가 감당하며 살아야 할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정말 측은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큰 생질에게도 내 '가족 메일'을 보낸다. 소소하고도 사사로운 내 일상들과 단상(斷想)들을 편지 형식으로 기록하는 글이다. 그 글을 현재 40명의 피붙이, 겨레붙이, 인연붙이들과 친지들에게 보낸다. 그 글을 큰 생질이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충실하게 읽어주니 미안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그 생질이 얼마 전에 집에 다니러 왔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 큰외삼촌 얘기를 한 모양이다. 오리고기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두 사돈어른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며칠 전에 아이가 집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하데요. '큰외삼촌은 기쁘게 사시는 것 같아요. 바쁜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으실 텐데, 그런 가운데서도 기쁘고 재미있게 사시는 것 같아요'라고 하데요. 그래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다 아는 수가 있다고 하데요."

나는 고마운 마음을 안으며 사돈어른들께 내 '가족 메일' 얘기를 해드렸다.

"제 사사로운 생활문들이지만, 제 자랑을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에요.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쁘게 사는 법을 특히 제 피붙이 겨레붙이 아이들이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보내는 거구요. 녀석이 그렇게 큰외삼촌의 메일을 열심히 읽어주니 고마울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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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7월 31일 경기도 남양시 '남양성지'의 '성모동산' 언덕길도 오르고...  
ⓒ 지요하

또 한해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고작 열흘 동안 집에 와 있던 아들 녀석은 지난 19일 논산 D고 기숙사로 돌아갔고, 중학생 조카 녀석은 20일 개학을 했고, 초등학생 조카 아이와 아내도 어제(27일)부터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방학이 가장 길었던 대학생 딸아이도 어제 새벽에 서울의 큰이모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은 이제 다시 낮 동안은 안온함과 정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낮 동안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아 있는 공간이 되니, 이상한 쓸쓸함도 느끼게 된다. 엄마 잃은 조카 녀석들을 데리고 사는 처지라, 새 아파트를 장만하여 지난해 연초 이사를 올 때부터 아예 내 방을 갖는 것을 포기했다.

별도의 방을 갖지 못하고 거실에다 컴퓨터를 놓고 작업을 하니, 고충이 클 수밖에 없다. 아무도 내 고충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 고충을 감내하자면 한숨도 나오고 눈물도 난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노상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또 방학이 끝나면 자연 해소될 터이니, 올해 여름방학도 그냥 무난히 감내했다.

그리고 올 여름방학에도 몸을 많이 움직였다. '빈자리'를 느끼고 의식해야 하는 슬픔을 안고서도 여러 번 '가족나들이'를 했다.

경기도 고양시의 '호수공원'에도 가고, 남양시의 '남양성지(성모동산)'도 순례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부여박물관 견학도 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서산의 영화관을 찾아 국산 영화 <화려한 휴가>도 관람했다.

원래는 올해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이번에는 중국 산둥반도로 가족여행을 할 생각이었다.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12명의 '범(範)가족'을 이끌고 일본 규슈 관광을 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가고 오고 했다. 그 또 한 번의 가족여행의 즐거움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평택에서 배를 타고 중국 산둥반도를 다녀올 계획이었다.

나는 2004년 6월 중국 산둥반도를 구경한 이력이 있지만, 나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마련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행사와 접촉,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아내의 오른쪽 무릎 관절 내시경 수술 때문에 그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 대신 고양시 일산병원에 다니는 기회를 타서, 그리고 내 12인승 승합차를 활용하여 여러 번 가족나들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7월 31일 고양시의 호수공원을 보신 어머니는 고양시민들을 부러워하셨다. 호수공원 다음에 간 남양성지는 어머니 외로는 모두 처음 가본 곳이어서 그만큼 감동이 컸다.

▲ 지난 1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견학하며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 지요하

8월 14일 국회의사당 견학은 안양의 누님과 안산의 누이동생 모녀도 함께 했다. 나와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이며, 아내의 공주사대부고 15회 동기인 문제풍 박사(국회 특별위원회 수석전문위원·차관급)의 초청 덕분이었다. 주차 문제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만, 특히 아이들에게 유익한 행사였다고 생각하며 문제풍 박사에게 감사한다.

지난 25일의 부여박물관 견학은 올여름 방학의 마지막 가족나들이였다. 최근에 발굴된 백제 유물들을 가지고 부여박물관이 '특별전'을 여는데, 그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사학도인 딸아이가 그것을 보고 싶어해서 또 한 번 시간과 수고와 비용 지출을 감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나들이에는 가능한 한 '성지순례'를 겸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날은 보령시 오천면의 '갈매못 성지'를 들렀다.

그런데 갈매못 성지를 갈 때 그만 내 승합차 한쪽 뒷바퀴의 타이어에 펑크가 나버렸다. 곧 보험회사 긴급출동 요원이 달려와서 수습을 해주었는데, 먼 길 운행 중 타이어 펑크가 나기는 지난 2000년 여름의 아찔했던 사고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나선 김에 천안의 정비업소에 가서 타이어 교체를 했는데, 정비업소 사장이신 내 막내 동서의 큰형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참 많이 움직이시네요."

<4>

▲ 25일 부여박물관의 '특별전'을 보고 나서 모녀 함께...  
ⓒ 지요하

요즘은 가족나들이를 하면서 종종 소설가 조정래 선생을 떠올리곤 한다. 조정래 선생은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을 쓰느라고 지난 20년 동안 가족과의 추억을 한 가지도 만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어떤 지면에서 조 선생의 그런 술회를 읽으면서 이상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조정래 선생과의 과거 인연 한 가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조 선생이 <한국문학>이라는 월간지 발행인을 맡고 있을 때였다. 서울의 무슨 문학행사장에서 조 선생을 처음 뵙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단편소설을 한 편 보내달라고 했다.

집에 내려와 오래전에 써놓았던 <한숨조심>이라는 단편 원고를 찾아 조 선생께 보냈더니 이내 <한국문학>에 실어주셨다(1986년 5월호). 그 작품은 평론가들이 중앙일간지와 문예지의 '월평'에 올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꿈이 있었고, 주변의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덧없이 세월을 잃더니, 이제는 작가 명색을 부끄러워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전히 소설 집필에 몰두하지 못하고, 마냥 세월을 잃고 있다. 그리고 어언 무안하고도 겸연쩍은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고 말았다.

여건이 완벽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망건 쓰다 장 파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안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지금의 여건 속에서라도 지금 당장 몰두의 시간을 잡아야 한다! 늘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맥이 풀리고 한숨만 나온다. 나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일이다.

이제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성공한 작가'를 탐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고, 작가로서의 '위기의식' 따위도 갖지 않기로 했다. 세속의 성공 쪽에는 초연한 상태로, '슬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사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성공한 작가'라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불후의 명작'을 쓴다고 한들, 인간 세상의 '불후(不朽)'라는 것 역시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천년을 가고 만년을 간다 해도 그 시간 또한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일 뿐이다.

덧없고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어차피 내 능력의 부족함을 헤아려 애면글면하기를 포기한 지경이라면, 차라리 '세상의 허무'를 잘 끌어안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작품은 쓰지 못하더라도, 내 삶 자체가 문학이고 신앙이기를 소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을 위해 더욱 기쁘게 살고자 한다. 그것은 '가족과 함께' 함으로써 가능하다. 우선은 가족과 함께 해야 하고, 그것을 이웃과도 나누어야 한다. 무슨 일에 함께 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기쁘게 사는 일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금 한갓진 시간을 맞았다. '가족 모두 함께 했던 또 한 시절'을 보내고 나니, 그리고 무더위가 다소 가신 가운데 다시금 우수의 가을 기운을 느끼다 보니, 새삼스럽게도 세월 무상과 인생 덧없음에 대한 소회(所懷)가 문득 피어올라 또 한 번 이런 하찮은 글을 써보았다.

▲ 우리 가족 모두의 '애마'인 12인승 프레지오 승합차. 2000년에 구입했는데, 벌써 7년이 지나고 있는 오늘 현재 170,588Km를 뛰고 있다.  
ⓒ 지요하


  2007-08-28 15:0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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