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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총 피정 < 8 >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강길웅 요한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29 조회수914 추천수13 반대(0) 신고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마르코 복음10장 51절의 말씀인데, 성경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리코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따라오면서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 시대에 눈 면 소경이나 장애인들은 그 삶이 아주 비참했습니다. 앞 못 보는 장애도 장애지만, 하느님한테 저주받았다는 사회의 인식 때문에 그들은 살아 있어도 마치 살아 있는 송장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환자도 말씀 한마디로 다 고쳐 주신다는 예수님이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신다고 하자 있는 힘을 다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거지가 소리치며 따라오니까 제자들이 귀찮고 창피해서 조용히 하라고 말려도 그는 듣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러다 묻습니다.


    "내가 너 에에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다 아시면서도 일부러 묻습니다. 이때 소경이 청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때 예수님은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시며 그가 눈을 떠서 다시 보게 해 주십니다. 죽은 인생과 다름없는 비참한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 그를 깨끗하게 살려 주십니다.


    제가 왜 이 주제를 택했고 하니,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앞 못 보는 소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안 봐야 할 것만 보아 온, 눈이 닫혀 버릴 소역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는 왜 눈을 떠야 하고 또 어떻게 눈을 떠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청각 장애인들은 손으로 보며, 때로는 듣는 귀로도 보고 먹는 입으로도 봅니다. 말도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유행가에도 "눈으로 말해요." 라는 가사가 있었죠? 말도 때로는 눈으로도 하고 손으로도 합니다.


   생 텍쥐페리는 그의 저서 『어린 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보인다고 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볼 때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며, 특히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신 사랑으로 바라볼 때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저의 반에 품행이 단정치 못한 신학생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평소에 공부도 안 하고 학교 규칙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공동생활에서 한 사람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우리 학년의 분심덩어리였습니다.


   저녁기도 후부터 이튿날 아침기도까지는 모든 신학생이 대 침묵을 지켜야합니다. 보통 침묵이 아니라 옆 사람과 단 한 마디라도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대침묵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신학교 생활 6년 동안 단 하루도 침묵을 지킨 적이 없습니다.


   또 출석을 부르지 않으면 신부님들 강의 시간에도 들어가지 않고 자기 방에서 혼자 놀거나 잠만 잡니다. 그리고 시험 때가 되면 남들이 준비한 것을 빌려다가 공부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전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수백 명이 전기

기구를 쓴다면 전기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은 전열기를

몰래 감춰 놓고는 날마다 라면 끓여 먹고 심지어는 아이들 불러다가 고기 까지 구워 먹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놈은 얼마 못살다 신학교를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봐도 신부 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가지도 않습니다. 한 번은 4학년 때였습니다. 학교 소풍을 갔는데 제가 오가피주를 마시고 취하게 되었습니다. 취했으면 얌전하게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취한 김에 학교 앞에서 막걸리 한 되를 더 마시고 들어갔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밤새도록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토했으며 이튿날 아침에는 미사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미사 때 제가 보이지 않자 신학생들이 몰려왔는데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서른네 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으니까 같은 반 학생들이 모두 조카 같은 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썽꾸러기 신학생이 제 방에 찾아와서는, 가라고 해도 가지도 않고 약을 사 온다, 라면을 끓여 온다 하며 하루 종일 제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러나 강의 시간이니 어서 가서 강의나 들으라고 해도 안 들어가고 이럽니다. '제가 어디 한두 번 빠졌나요?"


   저는 그때 그놈을 다시 봤습니다. 저는 그놈을 한 번도 사랑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저놈은 신부가 안 될 것이다. 하여 완전히 무시하며 살았는데, 그날 나에게는 그놈처럼 고마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뿐만도 아닙니다. 나중 얘기지만, 저는 이미 신부가 되었고 그 친구는 군대에 갔다 오느라고 2,3년 늦었습니다.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글쎄 이놈이 교황님 옆에서 부제 복사를 했습니다. 그걸 보고 하느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는 정말 다르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신부 되어서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어디 교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저 사람 이제 보니 괜찮은 사람인데."라는 말을 합니다. 그 뜻은 그 사람에게서 못 보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사람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또 "이 음식 맛이 제법 괜찮은데." 라고 말하는 것도 그 음식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단식을 일주일 하고 회복 식을 할 때 사흘째 날에 죽에다가 생멸치 두 마리를 반찬으로 먹는데 그때 멸치 한 마리를 백 번씩 씹었더니, 멸치가 그렇게 맛있는 고기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밥 먹을 때 반찬을 많이 놓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맛을 모른 채 먹고 있으며, 또 너무 빨리 먹기 때문에 음식의 소중한 맛을 모른 채 먹고 있습니다. 맛을 모르고 먹는다면 먹는 게 아니 듯이, 사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눈을 뜨지 못했다면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래 전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봤는데 그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누명을 쓴 채 도망가다가 어떤 집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앞 못 보는 시각 장애 어린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아이들과 이내 친해졌는데 어느 날 밤입니다.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자 이층에서 잠자던 여자 어린이가 슬그머니 일어나 커튼이 펄럭이는 자기들 방 창문을 조심스레 닫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가 젊은이가 자고 있는 방의 창문들도 모두 닫아 줍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 방을 나오는데 바로 그때 젊은이가 잠을 깨고는 놀라운 눈으로 그 여자 아이를 바라봅니다.


   눈먼 어린 소녀가 두 눈 멀쩡한 젊은이를 챙겨 주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때 '나는 과연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인가?'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아예 보려고도 하지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부인이 미장원에 가서 자기 머리를 예쁘게 올려 가지고 왔습니다. 여자들, 미장원에 다녀오면 예쁘죠? 그런데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이 자기 머리올린 것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을 먹은 뒤에 '여보, 당신 나 어디 달라진 데 없어요?" 하고 얼굴을 내밀며 묻자 남편이 흘깃 보면서 "모르겠는데." 하며 대답합니다.


   그때 아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당신이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자기 마누라 머리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그것도 모르느냐?" 하며 화를 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예쁘게 단장을 했는데,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까 섭섭한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보던 신문에서 눈도 안 떼고, "당신은 그 성질이나 고쳐요." 하며 같이 화를 내더랍니다.


   부부 사이가 이 정도라면, 재미없죠? 못 보니까, 부부도 부부 같지 않은 부부가 많으며, 가정도 가정 같지 않은 가정이 많습니다. 그러니 함께 살아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는 가정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이, 관심이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왜 폭력이 되는고 하니,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피정은, 내가 눈을 떠서 내 자신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간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담아 주신 보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물은 대부분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어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나 영의 눈을 떠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는가?


   첫째는, 나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실제로 나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데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자의 눈이 다르고 남자의 눈이 다르기 때문에 부부간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큰 싸움을 합니다.


   사람은 그래서 자기 눈높이만 고집해도 안 되고, 그 눈높이를 가지고 함부로 판단해서도안 됩니다. 이를테면, 꽃을 보는 눈은 다 다릅니다. 꽃이 모두에게 아름답고 예쁜 것만은 아닙니다. 마음이 슬픈 사람은 꽃을 슬프게 바라보고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꽃이 외롭게도 보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누가, "이 바보야! 꽃이 아름답지 어디가 슬프냐?" 하고 나무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저마다 눈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며 성품이나 능력 그리고 생김새도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을 한 사람의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인의 속담에 '자녀를 서로 비교하지 마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을 비교할 때 한쪽은 반드시 상처를 받습니다. "동생은 잘하는데 형은 왜 못하느냐?" 하면, 동생은 기가 살지 모르지만 형은 기가 죽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면 형제간에 시기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며 부모를 원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정관념이나 편견 때문에 사람을 잘못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으며, 또 사건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188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후줄근한 옷차림을 한 부부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총장실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총장 비서는 첫눈에, 이런 사람은 대학에 볼일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총장님은 매우 바빠서 약속 없이 오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때부부는 그럼, 시간이 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면서 한쪽에서 조용이 기다립니다.


   거절을 했으면 쉽게 돌아갈 줄 알았는데 무려 세 시간을 부부가 묵묵히 기다립니다. 비서가 할 수 없이 손님이 온 것을 총장께 말씀드리자, 그럼 잠깐만 만나 보겠다며 그들 부부를 불렀습니다. "뭐 때문에 오셨습니까?" 총장이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이에 부부가 대답 힙니다.


   "저희 아들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는데, 하버드 대학교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캠퍼스 어느 곳이든 아들의 이름을 따서 기념물을 하나 세워 주고 싶습니

다." 그러자 총장이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하버드를 다니다 죽은 어떤 사람에게도 동상 건립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하버드 대학교 전체가 공동묘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부인이 그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우리는 아이의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으로 건물을 하나 지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총장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건물을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십니까? 이 학교 건물을 모두 짓는 데 무려 750만 달러나 들었습니다."부인이 그 말을 듣고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총장이 고소하다는 듯이 부인을 쳐다봅니다. 아마 기겁을 해서 도망가리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 750만 달러는 지금의 돈 가치와는 다릅니다.


   1860년대에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주를 매입하는데 720만 달러밖에 안 들었습니다. 알래스카 주는 우리나라 남북한 전체 땅보다 무려 일곱 배나 더 큰 땅입니다. 그걸 그때 당시 720만 달러에 샀다면 750만 달러는 얼마나 큰돈이겠습니까?


   그때 부인이 남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여보, 대학교를 짓는데 겨우 그것밖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럼 차라리 우리가 대학교를 하나 세우는 것이 낫겠군요?" 그러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 캘리포니아에 가서 그들의 이름을 따서 대학을 세웠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스텐퍼드 대학교입니다. 스탠버드 대학교가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많이 배웠다 해서 올바로 보는 것도 아니며, 성직자라 해서 제대로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편견이 있으면 누구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했으며, 벙어리를 고쳐 주셨을 때는 예수님을 아예 마귀 취급했습니다. 왜 멀쩡한 분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마귀 취급했을까요? 왜 그랬죠?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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