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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총 피정 < 9 > 기다리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 강길웅 요한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30 조회수991 추천수16 반대(0) 신고

기다리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이런 얘기가 있죠? 어느 날 태조 이성계가 조선 전국을 도운 무학 대사와 얘기를 하다가 대사의 얼굴을 보고는 "대사님은 도는 깊을지 몰라도 얼굴은 꼭 돼집니다." 하자, 무학 대사가 답하기를 "제 눈에는 임금님 용안이 꼭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하고 응수합니다. 이에 태조 이성계가 미안해서 "나는 돼지로 봤는데 대사는 어째 나를 부처님으로 보는 게요?" 하자 무학 대사가 그럽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자기들 안에 죄가

있으니까 예수님은 계속 죄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또 그들 안에 마귀가 있으니까 예수님을 계속 마귀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 21,31)


   왜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이 경건한 의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왜 이런 모순이 생기죠?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 죄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뉘우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니까. 뉘우칠 수가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좀 떨어져서 자기를 봐야 합니다.


   제가 광주에서 살 때는 무등산에 자주 올라갔는데 올라갈 때마다 제가 사는 성당을 찾아 바라봅니다. 그러면 제가 산 위에 있는데 산 아래에 있는 제가 보입니다. 내 모순, 내 고집, 잘못된 사고와 행동이 산 위에서 다 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살 때는 안 보였는데 그 자리를 잠시라도 떠나니까 보입니다.


   "네가 왜 저렇게 살았을까?" 산에서 스스로 반성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합니다. 왜 외국에만 나가면 애국자가 되는가? 왜 그렇죠? 조국에서 살 때는 조국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외국에만 나가면 누구에게나 '대학민국' 조국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애국자가 됩니다. 애국자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사람 눈에 조국이 보이면 애국자요, 보이지 않으면 애국자가 아닙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집니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가 안 보입니다. 부모님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하거나 객지에서 설움을 겪게 되면 비로소 부모가 보입니다. 부모가 얼마나 소중하고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그때 알게 됩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는 그 대표적인 옙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은 말할 수 없이 나쁜 아들이었습니다. 이놈이 살아 계신 부모님한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해서는 도시에 가지고 나가 못된 짓으로 몽땅 탕진합니다. 결국 알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줍니다. 이놈이 뭘 잘했다고 송아지를 잡아 주는가?


   우리가 볼 때는 하나도 잘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놈이 아버지한테 최고의 상을 받는가?  살찐 송아지를 상으로 받았다면 최고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버지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큰 아들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아들이었습니다. 말도 잘 듣고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런 아들이 드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염소 새끼 한 마리 상으로 받지 못합니다. 다 잘했는데 어째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는가? 왜 이런 모순이 생기죠? 이게 이런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다 잘못했어도 알거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눈을 떠서 아버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다 잘했지만 아직 눈을 뜨지 못해서 아버지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합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이걸 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눈을 뜨면 맞아도 좋고 아들이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좋은 분이기 때문에, 그 집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하면 그게 안 됩니다. 안 보이니까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불평하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봉사하느냐? 이거 중요하지 않다. 왜 중요하지 않느냐?" 만일, 그가 주님께 눈을 뜨지 못했으며 기도하고 봉사한 것만큼 오히려 불평하고 시기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눈뜨면 누가 때려도 아프지 않고 누가 찔러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가끔 기도회에서 "은혜 받았다. 알렐루야!" 하고 박수를 치는데 저는 의심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정말 은혜 받았는지 알아보는 방법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뭔고 하니, 마음을 한 번 찔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번에 표가 납니다.


   저 사람이 정말 눈을 떴거나 진짜 은혜를 받았으면 누가 찔러도 아프다고 하지 않으며, 누가 때려도 섭섭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분이 너무 좋기 때문에 다 참을 수 있고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했으면 그게 안 됩니다.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 말 잘 듣고 공부 잘한다 해서 꼭 좋은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공부 못하고 말썽 피우는 아들딸이 나중에 더 큰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잘못한 그만큼 부모에게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전에 '에덴의 동쪽' 이라는 영화에 보면, 경건하고 착한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작은아들은 집 나간 제 어미를 닮았다 해서 아버지의 미움을 받습니다. 말썽꾸리기요 천덕꾸러깁니다. 제임스 딘이 그 역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 되자 큰아들은 아버지를 버렸지만 작은아들은 그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십니다. 이런 일들이 사실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느님께 충성하고 남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들은 다 하느님께 큰 빚을 졌던 부들입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따라서 자녀가 지금 잘못한다고, 부모가 함부로 자녀 가슴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주면 언제고 그 상처가 부메랑이 되어 부모에게 돌아옵니다.


   6.25 때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제가 집에 있는 돈을 하나 훔쳤다가 어머니한테 혼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걸핏하면 저를 도둑으로 모셨습니다. 돈이 좀 모자라다 싶으며, "너 또 돈 훔쳐 갔지?" 하고 다그치십니다. 아니라고 하면 "바른 대로 말하라." 라고 하시면서 더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그때 죽고 싶은 생각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마 아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셨을 것입니다. 상처를 준 자들은 자가기 상처를 준 줄을 잘 모릅니다. 다만 상처받은 자들만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부부간에도, 보모 자식 간에도 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우 아들이 대학에 다니는데 아주 잘 생겨서 따르는 여자들도 많답니다. 그런데 이아들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성을 느껴야 하는데 남자가 남자에게 이성을 느낍니다. 동성애잡니다. 아버지가 이를 알고는, 타일러도 안 되고 꾸짖어도 안 됩니다.


   나중에 아들이 그랬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아마 제 운명인가 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참 답답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제가 나중에 그랬습니다.


   아들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 탓만은 아니고 아마 조상 어느 대에 누군가가 여자들에게 죄를 많이 지어서 그 불행의 상처가 아들에게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만 탓하지 마시고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곳에서 연도도 바치고 미사도 봉헌해 보세요,  그 아버지가 제 말을 아주 잘 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이 아직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동안 아들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오해를 버렸다며, 저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이었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니 아들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건 농담이지만, 제가 술꾼 부인들에게 자주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부인이 제일 미운지 아십니까? 어떤 부인이 밉죠? 술 마실 때 그만 마시라고 옆에서 잔소리하는 부인이 제일 밉습니다."


   그럼 어떤 부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죠? 술이 좀 취했어도 "한 잔 더 드시겠어요?: 하고 술 따라  주는 부인이 제일 예쁩니다. 그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취했어도 저 여자가 나를 무시한 것은 잊혀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의식의 기억으로는 잊었어도 그 섭섭하고 화가 났던 분노는 무의식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그 여자를 치게 됩니다.


   언제 치느냐? 그 여자가 뭘 잘못했다든지 뭘 섭섭하게 했다든지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섭섭했던 감정이 툭 튀어나와서 사정없이 복수를 하게 됩니다. 이건 복수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섭섭한 것이 튀어나와서 때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아무리 취했어도 저 여자가 너무 고맙게 해 준 것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고마운 것이 의식으로는 잊었어도 무의식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은혜를 갚게 됩니다. 이를테면, 그 여자가 뭘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 지혜가 부족합니다. 눈을 뜨기 위해서는 자존심이나 체면을 버려야 하는데 그것들이사실은 너무 좋아 우리 능력이나 재주로는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고맙게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때가 언제냐? 그것은 원하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올 땝니다. 암에 걸렸거나 실패했을 때, 그리고 오해를 받거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눈을 뜨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억울한 아픔이 주어지면 본능적으로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각도를 좀 바꿔서 그 사건을 바라보면 놀랍게도 그 사건 안에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화를 얻게 됩니다. 아픔 속에는 필히 뭔가가 있으며 하느님은 공연히 때리지 않습니다.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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