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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분노속에 남은 사랑 / 이인주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02 조회수86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분노 속에 남은 사랑

사람은 늘 화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번 씩 분노를 한다. 물론 화나 분노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필요할 땐 화도 낼 줄 알아야하고 분노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노다지 그래서는 안 된다. 화와 분노는 꼭 필요한 때에만 필요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화를 안 낼 것 같지만 화를 내셨다.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이 아니고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그들과 분명히 원수가 될 것을 아시면서도 화를 내며 분노를 했다.
 
왜일까? 그것까지 참으면 본인이 못 견딘다기보다 세상이 더 이상 어딜 향해 가는지 가늠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전 정화 차원에서 성전에서 비둘기파는 이들과 돈을 환전하는 이들을 다 들어 엎으면서 분노한 것이다.
 
그건 아버지 집이 더 이상 아버지 집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참아서는 안 되는 영역의 것도 있다.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보여준 영역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사람들은 가문의 명예를 아주 중시한다. 얼마나 중시하는가? 좀 끔찍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는데 다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쓰레기통에, 그냥 누가 의족을 버렸나 했더니, 나보다 더 먼저 가던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기분이 나빠 돌아서 빠져 나오려하는데 저 쪽에서도 으악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쪽엔 팔이 있었다. 다른 한 구석엔 입에 담을 수 없는 주검들이 공원에 흩뿌려져 있었고, 거기다가 까마귀가 많은 나라인지라 공원으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들........
 
참으로 스산하고 슬픈 그런 산책 공원이었다. 집에 와 티브이를 켜니 가문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아들이 그런 식으로 화를 표현한 것이란다. 이유인 즉, 아버지를 모독하였기에 아들이 기회를 보다가 그 사람을 찾아 살해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시신을 토막 내어 공원에 뿌린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사건인가? 일본 사람들이 평소에는 상냥하기도 하고 참 친절하다. 그러나 화가 쌓이면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은 참으로 선한 민족인가 보다.
 
웬만하면 적당히 싸우고 타협하면서 나아가기에 저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으로 우린 참으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그런 영적영역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분노를 해도 상대를 사랑하는 구석이 있는 차원의 분노여야지 모든 것을 마감하는 그런 분노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들을 다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화를 내더라도 앞뒤를 살핌이 좋을 듯싶다.


그러기에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간 동안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분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철학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예수님은 아주 정확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를 쌓아 둘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화를 막 내라는 것이 아니다.
 
필요약이 되는 차원에서의 화를 통한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것이다. 좀 힘든 이야기긴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그 뿌리에 전제되지 않고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래도 그렇게 하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 주장은 바로 예수성심에서 나오는 것이요. 하느님의 분노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또 스트레스 전문의인 우종민 박사는
 
“마음력”이라는 책에서 분노가 생길 때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라고 충고한다. “첫째, 이 상황이 내 건강과 바꿀 만큼 중요한가? 둘째, 이 분노가 정당하고 의로운가? 셋째, 화내는 것이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방법인가? 다른 대안은 없는가?”
 
화를 내는 사람이 이런 것을 다 따지기엔 참 어렵겠지만, 그래도 화를 통해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아니 더 상처나 화를 입지 않으려면 이렇게 지혜롭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화는 친구로 남겨둘 수 있는 그런 것은 못 된다. 그러나 그 화는 늘 우리 곁에 함께 다니기에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근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화든 병이든 뭐든 간에 이것에게 질 때 우리는 들어 눕는 것이다.
 
들어 눕지 않으려거든 미리 나의 마음을 다스릴 힘을 키워라. 그것이 지혜이자 사랑이다. 아니면 예수님처럼 어떤 놈이 덤벼도 다 이길 수 있는 능력이나 배짱 그것을 넘어 다 끌어 앉을 수 있는 사랑이 있던지 말이다.
 

옛날에 무속 인들은 화병이나 온갖 정신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굿을 했다. 그 굿 속에 마귀나 화를 쫒거나 잡어 넣거나 아니면 아예 죽여 버렸다고 한다.
 
나는 어떤 방법을 택해서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라. 어디서 어떤 힘으로 그 화나 용서 못할 그 무엇들을 해결하고 있는가 말이다. 우리는 무속인들 보다 낳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많은 해결책들을 다양한 의학이나 종교 안에서도 해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마음 안에 다 담겨 있음을 알면 쉽게 해결책도 보일 것이다. 관, 묵상 안에서 나의 마음과 그분의 마음을 접목시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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