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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으로 궁금한 질문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06 조회수727 추천수11 반대(0) 신고
 
 
 

<참으로 궁금한 질문>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9,1-5)



  인간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갖고 삽니다.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자연현상이나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유사 이래 계속 제기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과학이라는 방법으로 궁금증에 대해 점차 많은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답을 얻는 방법은 먼저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지 따져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특히 인간본성과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도저히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이 겪게 되는 사건과 질병과 불행은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선천적 장애나 사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정말 그 답을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의문에 대해 늘 어떤 모범답안을 내리려하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고백하기보다 아는 체하려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유추하여 정답이라고 내놓습니다. 그런 뒤에 그 답안에 편하게 적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모르는 체 놓아두면 언제나 불쑥불쑥 의심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안다고 여겨야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내린 답이 옳다고 생각해야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수월하게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랍비들도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그런 의심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근본적인 원인으로 인간이 지은 죄가 이유가 된다고 편이하게 해석하여 답을 내렸습니다. 태생소경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 부모가 죄를 지어 그 자식이 하느님께 벌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부모를 단죄했습니다. 또 다른 랍비는 그 소경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어떤 잘못을 저질러 소경이 되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살면서 겪게 되는 불행과 부조리한 것들을 모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건강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은 상급을 받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징벌을 내리시는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고 숫제 자포자기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몇몇 사람들만이 으스대며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활하면서 많은 질문과 답을 통해서 나름대로 어떤 식견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길에서 태생소경을 만나자 궁금증이 떠오릅니다. 과연 랍비들 주장대로 그이가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 아닌지, 그렇다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어느 편 랍비의 주장이 옳은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에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답은 정말로 기상천외한 답변입니다. 먼저 그들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잘 살펴보면 대답은 ‘가와 나’ 밖에 없습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맞느냐는 질문입니다. ‘가’이야 ‘나’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랍비들이 정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틀렸다고 추호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처럼 묻습니다. 비단 여기서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도 ‘나’도 둘 다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답에는 단순히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제기하는 질문방법, 사고하는 방법이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던 방법 외에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가져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생각지 못한 내용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정말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답변입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발상의 전환을 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할 답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만 답을 얻으려고 한다면 도저히 해답을 구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눈으로만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그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개인문제이거나 인류 공동체의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과 관련되어 설명되어지는 것이지 개개인이나 공동체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 불행과 행복이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새롭게 눈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성별, 인종, 부유, 건강과 질병에 상관없습니다. 가느다란 실이 아니라 굵은 삼 줄처럼 질긴 밧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죄는 율법을 어기고 잘못을 범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끈을 알고서 그 끈이 내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고 그 끈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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