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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9일 야곱의 우물- 루카 14, 25-33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09 조회수550 추천수11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꿈이 있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영을 내리시리라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3,1)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예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지금은 그 꿈의 완성을 위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은 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치는 능력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말씀의 위력에 끌려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빵의 기적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줄 수 있으려니 하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모두 가니까 덩달아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멋있어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소망을 기대하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가긴 하지만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아셨는지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예수께서 가족 간의 불화를 일으키고,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을 유도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苦)를 낳는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혈연에, 물질적인 것에, 심지어 자신의 목숨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한 수도자는 물질에 대한 소유를 포기한다는 ‘가난서원’을, 혈연과 육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정결서원’을,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포기하는 ‘순명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각기 자신의 처지에 맞갖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난·정결·순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는 돌발적인 물음에 무척 당황하지 않았던가요?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이 부모와 집과 아내와 토지를 버렸으니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했지만 자기 목숨까지는 쉽게 버릴 수 없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요? 현세의 한자리를 꿈꾸는 그들과 예수님과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특별한 계층이나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따를 수 있지만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조건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반쯤 따르며 완전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한 카시아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들의 전통과 거룩한 책들의 권위에 따르면 포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대는 모든 열성을 다해 이 세 가지 포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 포기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포기는 그대의 옛 삶의 방식, 곧 악행과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격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포기는 미래의 삶만을 관조하고 또 보이지 않는 삶만을 갈망하기 위해서 모든 현세적이고 보이는 삶에서 그대의 정신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포기는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대로 말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먼저 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이 세상의 재산과 땅의 풍요로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친족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삶의 모든 방식, 곧 과거의 습관과 악행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세적인 기억, 집착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
 
그러나 가장 열렬한 신앙으로 첫 번째 포기를 실천했더라도 두 번째 포기를 같은 열성과 성의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포기를 실천하고 난 뒤에 세 번째 포기로 넘어감으로써 그대는 옛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옛 인간에 따른 아버지라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그토록 천상적이고 비육체적 삶에 주의력을 집중한 결과 그대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이 연약한 육체와 특수한 장소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면 밭갈이가 엉망이 되고 진도도 나가지 않겠지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이렇게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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