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지난 7월 어느 주일. 지리한 장마가 시작되고 연 이틀 동안 줄곧 폭우가 퍼부어 대는 한낮의 어둡고 스산한 오륜대 성지에서였습니다. “수녀님, 십자가의 길을 하고 싶은데 무서워서 산에 못 가겠어요. 누가 함께 가주면 몰라도`….” 한국순교자 기념관 앞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자매님의 떨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 이 젖은 목소리!’ 왠지 외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자매님, 이런 날씨에 어떻게 오셨어요? 어느 본당에서 오셨어요?” 인사말을 두서없이 건네면서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미끄러운 산길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더군다나 오늘은 주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속마음과 달리 저는 “자매님, 제가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에 동참해 드릴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런! 주님, 제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조금 전까지 마구 쏟아지던 졸음마저 매정하게 뒷걸음쳐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머나, 수녀님. 수녀님은 본명이 어떻게 되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정말 고맙죠.” 조금 전의 두려움 반, 난처함 반이던 자매님 얼굴이 무지개마냥 화사해졌습니다. 폭우 속에서 거북이 걸음으로 14처까지 가는 동안 구멍이 난 것도 아닌데 우산살 사이로 빗줄기는 튀고 연방 옷소매로 흘러내린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기도책을 흠뻑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자매님도 저도 비에 젖는지, 사랑에 젖는지 마냥 자비송을 외치며 빗속에서 8월의 태양처럼 뜨거운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잠시, 하느님의 종 124위에 올라 시복시성을 기다리고 계시는 이정식 요한 순교자(1868년 수영장대에서 참수)와 그 가족의 묘소 앞에서 묵념을 했습니다.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말없이 지고 가셨을 그분들을 생각하며, 폭우 속에서 했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게으른 수도자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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