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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14 조회수622 추천수5 반대(0) 신고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윤경재 요셉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하신 외침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바치는 외침은 우리가 단순하게 받아들이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과연 전능하신 주님이 어떻게 그런 단말마적 외침으로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분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면 최후의 순간에 그렇게 비참하고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 같은 표현을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습니다.

 

  - 우선 네 복음서에 나오는 이 장면의 말씀을 분석해보자.

Mr.15,33-39 

오후 세 시(유대 시간 아홉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셨습니까?”의 뜻이다.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이 듣고서 “보아라, 엘리아를 부르네.” 어떤 이가 달려가 해면을 식초로 채운 다음 갈대에 둘러서  마시게 하면서 말했다.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두고 봅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내시면서 숨지셨다.

 Mt. 27,45-54 

대략 오후 세시에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를 외치면서 영을 버리셨다.

 Lu. 23,44-48

군인들도 다가와서 그분을 조롱하였다. 그분께 식초를 갖다 바쳤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큰 소리쳐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숨지셨다.

 Jh. 19,28-30

 그 후에 예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성경 말씀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 “목마르다.” 하셨다. 거기 식초가 가득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식초가 가득한 해면을 히솝 가지에 둘러서 그분의 입에 갖다 바쳤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식초를 받으신 다음 “완성되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주셨다.     

                      - 이상 분도 출판사 ‘네 복음서 대조’에서 인용


 요한복음은  “완성되었다(다 이루어졌다)” 라는 말로 끝냄으로써 예수의 구원사업 전체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됩니다.

 루가 복음은 시편 31,6 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이차적인 해석을 담은 말로서 루가저자의 신학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마르코 복음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르코 복음은 원시 공동체의 신학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시공동체는 예수의 외침을 시편 22,2절의 말씀으로 보았고, 예수가 그 시편의 첫 구절 부터 외운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이 수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이에 새로운 주석을 합니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외침인 “엘로이”(나의 하느님)는 발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뒤 문맥에서 나오는 ‘엘리야를 부른다’는 내용으로 오해했다고 보기가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전부를 암송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지적합니다. 그래서 로핑크는 예수님께서 시편 22편의 일부를 외우셨는데 처음 몇 구절과 11절을 외우신 것으로 봅니다. 그 11절이 히브리말로 “Eli atta” 입니다. 즉 이 구절은 발음상  “엘리 아타”가 “엘리야  타” 로 들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엘리야 타”를 해석하면 “엘리야, 오소서”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따르는  “엘리야를 부른다”는 문맥이 자연스럽게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고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시편 22편을 외우시며 숨지셨다면, 이는 분명 시편의 내용대로 그분의 일생이 실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고통 중에도 무진장 깊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li  atta” 는 “당신은 내 주님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느님께 무한한 신뢰를 보내신 것입니다.

 

  마르코저자가 십자가 처형에 걸린 시간을 아홉시에서 오후 세시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정말 예수께서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면 이것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십자가형이 어느 사형방법보다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처형이라는 이유는 이 처형 방법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기가 매우 느리다는 데 있습니다. 죄인들 대부분은 사망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몇 번씩 기절했다가 깨어나고 마지막에는 기력이 쇠하여 순환 장애로 숨집니다. 그동안에 겪는 육체의 고통이 말도 못하게 심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두 발에 못이 박혀 있기 때문에 모든 체중을 두 팔과 가슴으로 지탱하게 됩니다. 이런 자세로는 얼마 안가서 심한 혈액순환 부전과 호흡곤란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주고 가슴을 넓혀 숨을 몰아쉬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발의 고통 때문에 몸이 쳐지는 동작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힘든 고통의 시간은 계속되지만 결정적으로 사망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출혈량이 적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걸리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간수들이 보다 못해 죄수의 다리뼈를 부러뜨려 죽음을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강제로 대량출혈에 의한 쇼크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가슴에 압박을 가하여 호흡 곤란으로 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서 19,31-32절에도 예수 옆에 매달린 죄수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날(파스카 축일)이 시작되는 시간 전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유대인들의 염려가 담겨있습니다.


   1968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그 유해의 양쪽 정강이뼈가 부러진 것이 밝혀졌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진술이 사실로 들어나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


  그 발견이후로 신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에 써있는 “그분을 마주 보며 곁에 서 있던  백부장이 그렇게 외치면서 숨지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는 고백을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 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소리쳐 외치는 것을 보고 놀라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는 가설을 생각하기 시작 했습니다. 성전 휘장은 처형 장소에서 멀리 있으므로 확인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앞당기시려고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죽음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셨다는 내용이 됩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외치신 단말마적 부르짖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어색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성자의 육신에 이 가혹한 수술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는 아버지께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거룩한 행위를 실행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의 행위는 우리 인간이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거룩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정화된 사랑입니다.


  그러면 “정화된 사랑” 은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사랑을 조건 없이 베풀 때 이루어집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사랑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사랑도 정화된 사랑으로 변할 때라야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사물의 질서를 파괴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순수했던 사랑이 애착으로 바뀔 때가 많습니다. 사랑마저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인간의 무질서한 감각과 유혹이 고개를 듭니다. 그 어둠으로 인해 타인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그를 완성에 이끄는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자기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9,22 b절에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비이지만 현실입니다. 고통만이 오염된 사랑을 정화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우는 고통이 사랑을 완성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만이 온전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십자가의 사랑마저도 자기의 영예로 삼습니다. 십자가마저도 제 자랑거리로 전락시킬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죽음의 끝까지 다 가도록 순수한 순명을 수행한 것입니다어떠한 신적 도움도 거부한 것입니다.

 

  그 심오한 표현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아버지의 부재”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에 그저 “단말마의 외침”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비움을 깨닫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의 예수 찬미가 중에 공허가를  살펴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립피 2,6-11 >


  우리가 갖는 의문이 아직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하여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미약이나마 깨우친 점이 있습니다.


  예수의 외침은 그분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죽음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시는 예수의 외침도 결국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수동의 외침이 아닙니까?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 낙담하고 어둠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 모습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뒤라야 인간은 초월의 길에 다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누구나 완전한 자기 비움( kenosis , unicizenie, 空)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불교의 선에서 말하는 ‘대사일번, 절후소생’의 과정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완전한 어두움에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난 후에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몸 바쳐 가르쳐 주시는 장엄한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사도9장,22장,26장) 경험한 예수님의 체험은 능동의 정화가 아니라 수동의 정화(필립 3,12; 갈라 1,15)가 이루어지는 예입니다. 그 후에 바오로는 많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고 다시 태어날 것(로마 6,11)을 요청합니다.


  또 많은 영성 스승들은 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관상을 행하고 그 결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체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영성의 스승들은 이런 상태를 ‘무지의 구름’, ‘어둔 밤’, ‘변형 (transformation)’ 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이 자기애와 독단적인 에고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자신에게 죽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단계에 철저하게 몰입할 때,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새롭게 영으로 탄생 시킬 때 (요한 3,3-5)만 예수님의 외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변형은 체험을 통해서만 생겨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선조들은 그들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간접적이나마 그 변형의 경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분들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변형과 일치’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관상에 머무를 때 ‘능동의 단계’를 지나 ‘수동의 이끄심’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러시아를 대표로하는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비움을 무척 강조합니다. 러시아어 ‘우니치제니에 Unicizenie’는 이 비움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온전하게 예를 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소설 속 등장인물(소냐, 뮈스킨, 조시마, 알료샤)에서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등장인물의 행동이 바로 바보처럼, 어리석게만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1고린 1,23)을  이해하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비움도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조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행위가 아버지께 받아드려져 부활의 영광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이기도합니다.


  이점이 바로 요한복음의 사상입니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 보다 ‘들어 올림’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영광스럽게 될 비움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의 길을 믿고 따르는 것 그런 비움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순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통해서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로마 8,15) 수 있게 됩니다. 영성의 스승들이 말하는 우리의 궁극 목표가 ‘하느님과의 일치’라면 바오로의 표현으로는 우리가 아버지께 양자로 받아 드려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수많은 비움의 행위가 예수의 빛으로 조명 받아야만 그 의미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애를 어둠이 아닌 생명의 기쁨이라고 표현 하시면서 사셨습니다.(요한3,29. 15,11. 루가10,21) 그분이 다른 예언자들과 구별이 되는 점은 자신의 신원에 인류구원의 모든 것을 연결시켰다는데 있습니다. 당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구원의 실현이며,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믿고 따르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요한16,24. 17,13) 말하십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만날 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요한 16,22 절의 약속은 죽음의 단절을 초월하게 해주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합니다. 또 요한복음은 “나는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롭습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협조자가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겠기 때문입니다.(16,7)”라고 말하여 예수의 의식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새로운 협조자(parakletos)인 성령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기 위한 길도 된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조망 속에서만  예수님 수난의 외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추신; 요새 많은 관심이 되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편지 내용은 이런 완전한 “어둔 밤” 과정 중에 계셨던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쓴 편지입니다.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할 과정이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거나 부정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겪으셨던 그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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