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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16일 야곱의 우물- 루카 15, 1-3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16 조회수580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2)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머리와 이론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체험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믿음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지식과 이론에 눈이 가려 현실 속의 생생한 하느님·예수님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예수는 율법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 따라서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란 인물 편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어울리는 죄인의 무리에게 하느님은 더더욱 그들 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들과 같은 의인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 편이어야 합니까?

 
 
1860년대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부 11개 주가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초반기 북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북부의 여론도 갈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링컨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북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메릴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 참모가 “대통령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 북군 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내 염려는 내가 하느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네. 하느님께서는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셨네.” 링컨보다 성경을 더 잘 알았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인지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라고 못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며 그들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예수님 주변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루카 15,1) 있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씨가 내 마음밭에 떨어져 싹이 납니다. 싹은 실천을 통해 점점 자라 나를 링컨처럼 큰 나무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온갖 새들이 ‘나’라는 나무에 깃들이게 되는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잃은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오늘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남성을 위해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여성을 위해서는 은전의 비유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부모를 위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십니다.

 
비유에서 양을 잃은 사람이나 은전을 잃은 사람이나 아버지나 모두 ‘찾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어이 찾고야 맙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태초의 아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먼저 곰곰이 계산해 봐야 한다고 하셨지만(루카 14,28) 당신이 우리를 찾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될지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계속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루카 20,13) 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하느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하나를 위해서도 치르신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이, 아홉 개 은전이, 큰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섭섭해할 만큼 잃은 하나에 집착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납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다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때 쉰들러는 유다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공장에서 일할 유다인들의 명단을 밤새 작성하고 그 대신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도 전범자이기에 떠나려 할 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유다인들이 그를 전송하며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를 감사의 선물로 줍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의 말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순간 쉰들러는 철로에 주저앉아 통곡합니다. 그동안 낭비한 재산과 끼고 있는 반지를 팔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을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라도 그 도시를 구하고 싶어 조심조심 하느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도 소돔을 멸하지 않을 구실만 찾으셨겠습니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라고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내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잃은 한 마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처사가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잃은 한 마리의 양이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보다 더한 통회의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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