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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23일 야곱의 우물- 루카 9, 23-26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23 조회수498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루카 9,23-­26)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는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 등 외적 요인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요소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무게가 다릅니다. 내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외적 시련이 실제보다 좀 더 가벼울 수도 있고, 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무게에서 ‘나’라는 것이 없어지면 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는 것, 그것은 곧 ‘나’를 버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 다음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니어그램을 통해(세상 사람의 성격유형을 아홉 가지 테두리 안에서 본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해를 해봅니다. 에니어그램이 보여주는 아홉 가지 성격유형은 우리의 거짓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완벽주의자 1유형,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남에게 헌신하는 조력자 2유형, 성취욕이 강한 3유형, 다른 사람보다 늘 특별해야 하는 낭만주의자 4유형, 타인과 늘 거리감을 두어야 편안한 관찰자 5유형, 매사가 불안하기에 충실한 6유형, 어두운 면을 외면하는 낙천주의자 7유형, 힘의 원리에 의존하는 8유형, 관계를 해칠까 봐 자신을 작게 평가하는 평화주의자 9유형.
 
이렇게 성격이 형성된 이유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내가 ~`해야만’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데 있다는 것, 그래서 ‘~`되어 사랑(인정)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 자아를 발견하고 그 껍질을 벗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을 채워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지만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되기까지가 힘겨운 여정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예수님처럼 균형 잡히고 반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비틀린 자신을 보고 올바로 풀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만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구나.’를 몸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식들을 몽땅 잃고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하였지만 그러고도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을 때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대가를 치렀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날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날의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여러 가지 희생과 노고입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혹은 없애고’가 아니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지만 지셨습니다. 어느 정도 지고 가다가 내려놓은 것도 아니요, 죽을 때까지 지셨습니다. 우리도 죽는 날까지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한테 부과된 십자가를 메고 가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자신의 것이 훨씬 무거운 것 같아 십자가를 준 사람에게 잘라 달라고 하였지요. 조금씩 조금씩 잘라 내어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나중에 큰 구렁텅이를 만납니다. 모두 자신이 메고 온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 구렁텅이를 지나 낙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는 십자가가 짧아서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오는 롯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은 롯의 가족을 소돔의 멸망에서 구해 주시고자 했습니다. 천사들이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7)라고 재촉하자 롯은 “그렇지만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제발 그리로 달아나게 해주십시오. 자그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창세 19,19-­20) 하였습니다. 그는 산까지 갈 십자가를 가까운 성읍까지만 가도록 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산까지 가라고 하셨을 때는 그가 갈 수 있도록 안배해 주시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롯은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저 자그마한 성읍’에서 살 작은 그릇, 롯이란 그릇이 그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에 그는 산 정상에서 맛보는 완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롯을 산 정상으로 초대하셨듯 우리 모두한테도 ‘야훼의 산’으로 올라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산은 율곡 선생의 시 “밟은 이 있어도 발자국 없고, 죽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고, 오르지 않고는 살지 못할 마음속에 아득한 산 하나”와 같은 산입니다.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성인들 중 많은 분들이 무식쟁이였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이 두려워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루카 22,57) 한 것과는 달리 그분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형리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논리적으로 증거하며 귀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은 오늘 ‘산’ 정상에서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면서 후손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피 흘림 없는 순교를 하도록 간구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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