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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총피정<21> 왜 때려 3부 - 강길웅 요한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9-27 조회수1,162 추천수13 반대(0) 신고

               

 

                    왜 때려! < 제 3 부 >

                             

   십자가는 세상의 저주였습니다. 누가 십자가에 매달렸다 하면 그는 저주 받은 자이며 집안의 불명예요 불행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전 생에 죄가 많아서 짊어지는 아픔이요, 팔자가 사나워서 얻어맞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용서하고 참으며 사랑했던 모든 일들이 다 허무로 돌아가게 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결코 지금 힘들다 해서 불행이 아니요, 시련이 주어졌다 해서 비극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는 저주라는 판단 때문에 세상을 지옥처럼 사는지 모릅니다. 절대로 저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몽땅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더 이상 저주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스치셨다하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그분이 밟으신 땅은 성지요, 담그신 물은 성수가 됩니다. 입으신 옷은 성의요, 또 낳으신 어머니는 성모가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도 보통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성 십자가가 됩니다.


   고통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고통은 불행이요, 죽음은 가장 큰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고통도 은혜며, 예수님 친히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죽음도 은혜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믿었던 것은 결코 참된 복이 아니었으며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놀라운 은혜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벌이나 수치가 아닙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들어 공포 했습니다. 누구든지 간음하는 자는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왕의 외아들이 이 법을 어겼습니다. 왕자만을 용서하자니 백성들 앞에 체통이 서질 않고, 그렇다고 두 눈을 뽑아 버리자니 왕이 될 사람인데, 그렇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해서 여러 날 고민 했으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이었습니다. 왕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내린 결단이 왕자에게서는 눈 하나만 뽑고 나머지 눈 하나는 왕 자신의 것을 뽑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밖으론, 나라의 법을 지켰고 안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을 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애꾸눈이 된 왕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내력을 모르는 다른 백성들에겐 왕의 애꾸눈이 웃음거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눈 하나가 없는 것이 그저 병신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친히 저주의 고통을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현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이들에겐 십자가가 한낱 웃음거리요 놀림감이 될지 모르나, 신앙인들에겐 빛나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십자가의 사랑과 승리를 기념합시다.


   마태오 복음16장2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당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립니다. 메시아가 저주의 십자가에 진다는 것은 웃음거리요 스캔들입니다. 절대로 그런 망측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걱정해 드리려다 오히려 된통 얻어맞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저주하는 자도 사탄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판단 만을 고집하는 바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거부하면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우리가 십자가를 버리면 어떻게 그분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억울해도 짊어져야 합니다.



   병든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생각할 때 어머니는 무거운 짐 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준 것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오빠가 있고 또 언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소변을 받아 내야 할 병든 몸이 되자 자기를 찾아온 것이 딸은 싫고 미웠습니다.


   한번은 ‘십자가의 은혜’라는 강론을 듣고 더 괴로워했습니다. ‘어머니가 은혜’라는 말씀이 괜히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울었습니다. 원통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울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은혜가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상했습니다. 결코 뉘우쳐서 운 것이 아니라 그냥 속상해서 울었던 것인데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갑자기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오갈 데 없이 외로운 신세가 된 어머니가 가엾게 여겨졌습니다. 오빠가 있고 언니들이 있지만, 그러나 며느리가 두렵고 사위가 무서워 가실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가실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실 곳이라곤 자기 집밖에 없습니다.


   피정이 끝난 뒤 딸은 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잘못 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우셨습니다. 어머니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죄가 많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울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잘 모심으로 정말 존경받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는 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을 모르는 조개 안에서 아름다운 진주는 생성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서 내면을 감싸는 노력과 애정에서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 집니다.

<  제 4 부에 계속 >

 

                         

 ♥은총피정- 사랑하는 만큼 기다리는 만큼♥ 中에서 / 강길웅 신부(소록도 본당 주임)

 

 

                                 
                                         [떼제성가]Nada te turbe..두려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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