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08 조회수830 추천수13 반대(0) 신고
 
200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Lk.10.27)
 
 
제1독서 요나서 1,1─2,1.11
복음 루카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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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할 때, 단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단맛이 나지 않을 때와 짠맛을 아무리 내도 더 이상 짠맛이 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단맛을 더 내고 싶을 때는 설탕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을 간장을 조금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단맛이 더 강해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짠맛을 더 내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할까요? 간장을 더 넣는 것이 아니라 설탕을 아주 조금 넣어보면 짠맛이 짙어진 것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반대의 것으로 오히려 맛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습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행복할까요? 사실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점은 부유한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은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은 오히려 나를 행복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더욱 더 행복해지게 만드는 것을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것도 나만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더 행복하게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설탕이 아닌 약간의 간장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또한 짠맛을 더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간장이 아닌 약간의 설탕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아니라 약간의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의 실천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당시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아무리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멸종되어가는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얻어낸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나비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비와 공생 관계에 있는 개미도 보호해야 한다.’

이 세상에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지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이웃과 친구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야 나를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그들도 행복하고, 그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시다.



있는 그대로(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인생수업' 중에서)

집에 돌아오는데 열여덟 살 된 아들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어요.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아들은 여자친구한테서 얻은 꼴사납고 색 바랜 티셔츠를 입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어요. 아들이 그 옷을 입고 있는 걸 이웃 사람들이 보고 자식 옷도 제대로 못 입힌다고 흉볼까 봐 걱정이 되었어요.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난 옷차람부터 시작해 아이를 야단쳤어요.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우리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어요. 그날 나는 당신의 워크숍에서 해 본 '삶과 작별하는 연습'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삶이란 나에게 잠깐 동안 맡겨진 선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영원히 내 곁에 두지는 못하겠지요. 문득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봤어요.

'만일 내일 아들이 죽는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 그러자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한 엄청난 상실감과 후회의 감정을 갖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으로 계속 이렇게 끔찍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 아이의 장례식에 대해서도 상상해 봤어요. 나는 아들에게 정장을 입혀서 묻지는 않을 거예요. 정장을 입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거든요. 그 애가 그토록 좋아하던 지저분한 셔츠를 입혀서 묻을 거예요. 그렇게 그 애의 삶을 기리게 될 거예요.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이 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겠구나.' 그 애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선물을 줄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에게 마음대로 티셔츠를 입어도 좋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아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그 애를 사랑하니까 정말 행복했어요. 나는 더 이상 아들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아요. 지금 이대로의 모습도 사랑스럽다는 걸 알았거든요.
 
 
“And who is my neighbor?”
...
He answered, “The one who treated him with mercy.”
Jesus said to him, “Go and do likewise.”
(Lk.10.29.37)
 
Love's First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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