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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약한 마음!
작성자황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09 조회수897 추천수12 반대(0) 신고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묵상』
황 미숙 소피아 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 29-37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은 인종차별과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에게 강도당해 죽어가는 어떤 행인을 맡기셨다. 그렇다면, 주님은 내게도 어떤 강도당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맡겨주셨을까? 오늘 복음을 읽고 내 나름대로 묵상하며, 왜 이리도 가슴이 찔리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자기 자신의 고약한 마음을 직시하고 들여다본다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님에 틀림없다.


외상을 입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아니더라도,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거리의 낙엽처럼 흔들리는 영혼의 소유자들이 있을 수 있다. 말동무 해 줄 사람이 그립고, 따뜻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가슴 시리게 그리운 이들이 있다.


한 달 전부터 우리 집에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저녁마다 찾아오신다. 노인회관에서 우연히 우리 어머니와 알게 되셨는데 우리 집 근교에서 홀로 사신다.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당하신 후, 평생을 객지에서 남의 집 살이 등을 전전하시며 재혼도 못하시고 홀로 살아오신 할머니이시다.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연상이시지만 총기도 좋으실 뿐만 아니라 건강하시고 또 정갈하시다. 우리 어머니 드시라고 남은 반찬이며 과일·떡 등을 드시고 저녁마다 우리 집에 마실오셔서, 함께 드라마도 보시고 어머니로부터 안마(*^^*)도 받으신 후 돌아가신다.


처음엔 그렇게 찾아오시는 할머니가 반갑고, 또 어머니와 말동무도 해 주셔서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 가실 때마다 배웅해 드리며, 자주자주 오시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그런데 매일 마실 오시면서 꼭 먹을 것을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시는 것 같아 부담감이 느껴져 그냥 오시라고 부탁을 했더니, 내 말을 잘못 곡해하셔서 우리 집에 오시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이시기도 하셨었다. 나중에 오해는 풀렸지만….


할머니께서는 신경통이 있으셔서 병원 치료도 받으시는데, 저녁마다 우리 어머니께서 어깨 안마를 해 주시는 것이 고맙고, 당신 혼자 계시는 집에 남아도는 음식물을 남겼다 버리느니 우리 집에 가지고 오시고 싶은 맘이 있으셨던 것 같다. 특히 보릿고개를 겪으신 어른들은 음식에 대한 경외가 우리 세대와는 자못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저녁 시간엔 나도 좀 쉬고 싶은데, 저녁마다 찾아오시는 손님이 언젠부터인지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연히 엄마가 할머니 어깨를 안마해 주시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할머니께서 내 눈치를 보시는 것 같고, 처음과 다르게 나날이 눈치를 보시는 할머니가 좀 민망스럽고 나도 괜히 눈치가 보이는 것이었다.


'이틀이나 며칠에 한번씩 오시면 좋으련만….'


날마다 당신 집에 있는 먹을거리를 싸들고 찾아오시는 할머니가 좀 걱정도 되고, 점점 내 눈치를 살피시는 할머니가 조금씩 덜 반가워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할머니 가까이 친척이 살고 있어 할머니의 생활을 잘 보살펴주시고 계신 것으로 안다.


나의 이런 심정과 걱정을 엄마에게 슬쩍 내비치었더니, 엄마는 사람이 그리우셔서 할머님이 찾아오시고 함께 말동무도 하시고 연속극도 같이 보시니 동무 되어서 좋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서 매일 먹을 것을 싸 가지고 오시고, 내 눈치를 보시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는 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 한 사람의 지나온 아픈 삶을 알지 못하고선 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행위의 결과엔 반드시 동기가 있듯이 말이다.


그 할머니께서 며칠 전 시골에 내려가셨다. 가시기 전에 또 친히 들리셔서 당신의 시골 방문 일정을 다 통보해 주시고 떠나셨다.


그런데 그 이후, 변덕스러운 내 마음에 심경 변화가 일어 할머니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저녁마다 우리 집에 오시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이 그리우신 것이다. 사람 냄새 …가족 냄새…그리고 딸 같은 나를 보시는 것도 좋으시고, 나와 대화하는 것도 좋으신 것이다. 또, 있다! 가져오신 과일이나 빵 등을 내가 맛있게 먹는 것도 당신 보시기에 좋으신 것이다. 눈치 빠른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그 마음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그렇게 불편해했을까? 할머니가 사신다면 얼마나 오래 사신다고….


그런데 너무 우스꽝스러운 것은, 할머니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먹었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고약한 내 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더 불편한 것이다. 아, 내게도 이런 곱지 못한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구나.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고 결국 인정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괴로움이 할머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화려한 "립 서비스(lip service)"가 아니다. 내게도 경건하고 신실한 체하는 바리사이들의 완벽주의자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음을 본다.


나 자신의 복음화와 영적 성숙을 위해 매일 복음을 읽고 채집되는 느낌과 생각 그리고 체험들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내 숨겨진 모습들을 많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바리사이와 같은 종교적· 도덕적 완벽주의자적인 모습 또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발견해 내었다.


미사여구와 경건한 문구로 주님을 찬양하는 립 서비스는 무한정 아름답게 할 수 있지만, 믿음을 내 가슴과 두 손과 두 다리로 직접 옮겨오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신앙이다. 시골에 내려가신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쨘~하기만 하다. 시골에서 돌아오시면 열심히 우리 집에 마실 오실 터인데, 앞으론 성심성의껏 잘 대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나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아니고 사제나 레위에 속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내 고약한 심보를 고쳐주시고 싶어 할머니를 내 손님으로 보내주셨는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강도당한 행인을 맡기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강도당한 행인"을 보내고 계신다.


오늘, 강도당한 행인으로 변장한 체 다가오는 내 이웃은 누구인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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