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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거짓 관상가' [화, 수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09 조회수659 추천수6 반대(0) 신고

 

마르타는 '활동' 이며, 마리아는 '관상'이다는 절대적인 '공식화'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활동' 안에서의 '관상'이고, '관상' 안에서의 '활동'으로써 '활동'과 '관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고스"이시며, 또한 "성체"이십니다

"말씀(로고스)이 - 사람(성체)이 되신" 분이십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분주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일에 '차분한' 사람의 표징입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근심과 걱정으로 매여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일'에 일치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람에게 내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사람 안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반대자' 입니다

'관상기도'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를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처(마음)인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우리가 머물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을 되살아 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09>

'거짓자아'를 버리고 ( "자기를 버려라" )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 정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제물(천상의 이름)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관상기도의 은총은

'아드님'과 더욱 깊이 일치함으로써 사랑하시는 성부의 뜻에

'겸손'하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은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며 <거짓자아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분주함보다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고요 (침묵= 비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의 눈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니

그분의 눈길 아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하느님(닮은 유사성)되게 하시려고

- 하느님이 되신게 아니라 -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즉 사람이 '하느님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사람은 '오늘' 사람이면 됩니다 (겸손)

"하느님께서 너희를 사랑(관상)한 것처럼 + 너희도 서로 사랑(활동)하라"는 새계명은

<관상 + 활동>을 분리시키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사랑의 모습은 말씀이 성체가 되시어 - 사람 안에 - 모두 다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이시니

"말씀을 받아 들이는 '신(하느님)의 사람(자녀)' 은 <말씀의 성체적인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는 (내어 주는) '희생제물' 로써 [ 서로 사랑 (사람을 사랑) ]함 입니다

'관상'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친밀한 교제(친교, 우정)를 온전히 나누는 사람은

주님(예수님)의 사랑 "그대로"가 '활동' 안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실체, 천상의 이름)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껍데기)만을 빌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오늘' 사람은 '예수님 처럼' (그분의 모습) 그분을 따라 가게 된다(변형의 일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이 성체(사람의 본성)가 되셨다>는 '강생의 신비'에 초대되어

생명과 사랑의 '활동'이

그리스도의 힘으로 자기 '실존' (실체의 존재, 천상의 이름)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겸손한 여종의 '피앗'이며, 내 외적인 침묵 (비움)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환'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져다 주는 - 사랑의 일치(변형)를 이루는

관상기도는

신비적 현상에 집착하여 '거짓 세상 평화'를 얻는 영적인 탐닉(탐식)이 아닙니다

주검의 시체(탐식)를 찾아 헤매는 '게걸 들린' 짐승의 그러한 동물적 본능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비적인 현상(심령현상)를 바라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이에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짓 잔재'들은 <순수한 믿음>을 저해할 뿐만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신비)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하느님을 사람에게 내어 주심)께서는

우리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 현존' 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현존을 '활동과 관상의 일치' 안에서 체험함으로써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끌어 안음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바닥에 계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끌어 안음으로써 치유되는 것입니다

게세마니의 고통의 시간에 잠을 청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는 '오늘'이어야 합니다

활동과 관상에서 '거짓 관상가'는 오직 '관상'의 영적인 감흥(탐닉)에 집착하지만

'참된 관상가'는

자신의 깊은 심연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게세마니의 기도에 동참하고

- 사람을 사랑하시는 -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 에 협력(그리스도의 남은 고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한) 에 

결합 (활동과 관상의 일치) 되는

'예수 (주님)의 기도(삶)'

원수( 죽음과 고통과 죄악 )를 억누르는 권한(주님의 이름, 예수)을 지닙니다 [ 72제자 파견의 비유 ]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비천함'에도 놀라지 않지만

교만한 사람은

그리스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여 좌절감에 빠지고 맙니다

게세마니의 예수님 기도에 동참한다면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 밖에서 - 구하고자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여기에 구속자가 있다, 저기에 구속자가 있다'는 [ 악(적그리스도)의 유혹 ]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밖에 있지 않으시고 - 자기 안에 (사람으로) 오시어 계십니다

[ 활동과 관상의 일치 ] 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파스카 성체의 모습(천상의 이름, 천상의 자기 실체)은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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