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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 14일 야곱의 우물- 루카 17, 11-19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14 조회수552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1-­19)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모두가`/`꽃같이 아름답고`/`…`꽃같이 서러워라`//`한세상`/`한 세월`/`살고 살면서`/`난 보람`/`아라리`/`꿈이라 하오리(한하운 <생명의 노래>)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보는 세계입니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마음이 더 서럽고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마을은 애매한 경계 지점에 있습니다.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마을일 수도 있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완충지대 구실을 할 수도 있는 지점입니다. 그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옵니다. 나병 환자 그들은 사회에서 분리된 죄인, 서러운 운명을 안고 사는 사람들로서 갈릴래아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난 경계 지점이 그들의 거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나병이라는 공통점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혈통과 지역감정을 넘어서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한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습니다. 절박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꿈같은 한세상 사랑하며 살아도 아까운 시간을 눈 흘기며 살 이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처지이니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지요. 세상에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이 죽어 지내는 사람도 많고,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무관심하니까 분신자살이란 방법을 선택하면서까지 부르짖기도 합니다. 예리코의 소경도 그랬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처지를 알릴 방법은 목소리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중하였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도 소리 높여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듯, 우리도 이런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겼을 때 사제에게 보여주고 사제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부정한 이로 선언되면 공동체에서 격리되고, 병이 나으면 정결한 이로 선언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정식 절차를 밟아 공동체에 귀속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면서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도, 그로 인한 영광을 누리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낫게 해주십니다. 이 엄청난 결과에 비해 나병환자는 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말씀에 순종하면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 치유 방법이 너무도 시시한 것이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 했지요.(2열왕 5,10-­12) 하느님께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단순한 믿음만 보이면 이 같은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너무 거창하고 힘든 것으로 여김으로써 은총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복음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이방인들을 언급합니다. 이웃에 대한 비유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고(루카 10,29-­37),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루카 23,47). 요한복음에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전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4,1-­42)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질책하시는 것도 같고 서운해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은혜를 받고 난 뒤의 일입니다. 주님은 백 마리의 양 떼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하나를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열 명을 낫게 해주셨지만 단 한 명만 감사드리러 오는 실속 없는 일만 하십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감사드리러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아홉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열 개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보다는 없는 하나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되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처의 치유가 구원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 명 중 구원에까지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입니다. 자신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선물임을 인식할 때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결국 이 사마리아인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해진 것입니다. 아홉은 그들의 공동체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하느님과 ‘멀찍이 선’ 관계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다인을 넘어서 세세대대 모든 이가 당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구원의 길을 넓혀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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