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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총피정<30> 기도의 즐거움 - 강길웅 요한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30 조회수1,331 추천수16 반대(0) 신고

                                

 
 

기도의 즐거움


 

   기도를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대화란 서로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모르면 주고받을  말이 없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저에 한 여학생을 소개받았는데 학교도 서로 달랐고 이름

도 몰랐습니다.  그대 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여자를 한 번 만나보고는 '세상에 여자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어떤 여자도 만난 기억이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색하고 쑥스러우며 또 굉장히 피곤합니다. 따라서 대화를 하려면 서로 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듣고 싶은 것이 있고 또 들을 것이 있으며 그리고 할 말이 있고 또 하고 싶은 말도 있습니다.  서로 잘 알면 몇 시간을 대화하며 함께 있어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면 단 십 분도 어렵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면 하느님 앞에 나온다는 것이 참으로 어색합니다.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모르니까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분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기도 시간만 되면 답답하고 고달프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기 위해선


  첫째로 하느님을 알아야 하며, 하느님을 알기 위해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알게 되니까 믿게 되고 믿으니까 우리도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알기는 압니다. 밥해 줘서 고맙고 빨래해 줘서 고마우며 돈 벌어다 가르쳐 주니까 고맙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고마움과 사랑이란 것이 대개 이기적입니다. 늘 달라고만 하며 자기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커서 저희들도 시집가고 장가들어 아이도 낳고 고

생을 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부모의 사랑이 어떤지를 깨닫게 되며 그때의 사랑은 또 이타적이 됩니다. 부모의 고마움을 아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모시려고 합니다. 기침 소리만 나도 무슨 뜻인지 알고 받듭니다. 기도의 내용을 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는 늘 뭘 달라고만 합니다. 하느님이 계속 풍성하게 주셔도 오히려 안 주신다고 불평만 합니다. 그러니까 늘 툴툴거리며 말도 안 듣습니다. 기도도 안 하고 성당에도 안 나갑니다. 그러니까 냉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얻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세상이 더 풍요로우며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기도의 대화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도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이는 자연적으로 하게 됩니다.


   어떤 자매가 성경을 읽다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좀처럼 이해 할 수가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었답니다. 그 자매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남편하고도 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특히 남편의 술주정 때문에 늦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술만 마셨다 하면 집안이 불안합니다. 성사 볼 일도 없는데 남편 때문에 늘 성사를 봐야 합니다.


   하루는 갱생원이라는 곳에 방문을 갔다가 거기서 대소변을 처리 못하고 혼자 방바닥에 그냥 버려져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됩니다. 그때 이 자매에게

퍼뜩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똥오줌 싸며 방바닥에 뒹구는 것보다야 술

주정이라도 할 수 있는 건강이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자매가 남편의 술주정을 은혜롭게 받아 줍니다. 기쁨으로 받아 줍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남편의 술주정이 점점 줄어들더랍니다. 그러면서 그 자매가 은혜 받은 얘기를 하는데, 전에 자가가 남편이 술 좀 끊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는 기도 자체도 성가시고 힘들더니, 남편 건강에 대해 오히려 감사드리니까 기도 자체가 그렇게 편하고 즐겁게 되더랍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는 사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자체가 너무 이기적이라 세상을 자기 수준 그 이상으로는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받은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답답하고 하느님도 답답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진정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그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경을 읽어야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둘째로, 대화의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이 잘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똑똑하게 말을 잘한다 해도 그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대화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또 들으려는 성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예 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피곤합니다.


   효자는 부모님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어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부모님의 심기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효자는 모릅니다. 기침 소리나 발소리가 아니라 앞에 대고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못 알아듣습니다. 듣지를 못하니까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불효자와는 그래서 대화가 되지 않으며 대화가 통하지 못하니까 부모에게 삿대질을 하며 덤벼듭니다.  부모님의 뜻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효자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효자는 부모와 쉽게 대화가 됩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알아듣고 때로는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그냥 알아듣습니다. 그런 경우는 부모도 자식도 다 편안합니다.


   또한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아주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그런 아이는 숟가락만 놓으면 학교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아이는 학교에 안 가려고 하며 부모가 때리는시늉을 해야 간신히 갑니다. 사탕 값이라도 받아야 그 재미로 다닙니다.


   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알아듣는 사람은 기도 시간이 즐겁습니다. 시간 만 나면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못 알아듣는 사람은 기도가 중노동입니다. 5분도 안 돼서 하품이 나오고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안 하려고 합니다. 기도 시간만 되면 이런 사람은 공연히 화를 내고 아주 불안해합니다.


   저는 농아 남매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다 말 못하는 농아인데 두 자녀가 말을 못합니다. 위로 딸 둘은 말을 잘 하는데 아래로 두 남매는 왠지 귀청이 잘못되어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말을 못합니다.


   본래 집이 가난하고 말 못하는 부모가 시골에서 다 키울 수 없으니까 제가 대신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남자 아이가 다섯 살, 여자 아이가 일곱 살 때 데려왔는데 지금은 결혼을 해서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들과 말을 못합니다. 제가 수화를 못하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서로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저와 함께 있는 아가씨가 수화를 배워서 통역을 해 주며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아줌마는 그들과 제법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놈들이 달걀을 쪄 달라고 한다." 라고  웃기도 하며 "생선을 구워 달라고 한다." 라는 말을 하면서 서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줌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그 아이들이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신통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한번은 아주머니가 신부님 드시게 맥주 한 병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니

까 남자 아이가 슈퍼로 달려가서 맥주 한 병을 사고 돈 300원을 딱 거슬러

오는 것입니다. 아주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없을 때 제가 똑같은 방법으로 맥주 한 병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니까 제 말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놈아 보긴 뭘 보느냐? 한 병 사오너라." 하며 가게로 보냈는데 이놈이 나갈 때는 아주 신나게 나가더니 기다려도 안 오는 것입니다. 2~3분이면 사오는데 10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나도 아이가 안 옵니다. 슈퍼가 바로 성당 앞에 있는데도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 되어 나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놈이 등나무 밑에 혼자 앉아서 사이다 한 병을 놓고 홀짝홀짝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이가 없어서 "이놈아, 너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놈이 이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니 돈 700원을 보여 주면서 '사서 마시라고 했잖느냐?' 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묘했습니다. 똑같은 방법이었지만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들도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들 흉을 볼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아주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기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은 분명히 못 알아듣는데도 눈치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걸 보면 귀가 먹었다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 농아들의 착한 면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도 있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귀여운 면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어김없이 아주 입장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말을 알아듣고 있을까요?


   대화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화 자체가 너무 고달프게 됩니다. 대화란 때로는 눈으로 하며, 때로는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충분한 대화가 될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은 못해도 서로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눈만 봐도 알게 되며 또 그 표정만 봐도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배가 고픈지 아니면 어디가 아픈지 이내 알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가 안 된다는 것은 이를테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느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불행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며 애정이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애정을 가지고 자주 함께 있어야 하고 또 자꾸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셋째는, 기도할 때 긴 말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은 간단하게, 그리고 마음은 오랫동안 시간을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길어지다 보면 거짓말을 하게 되면 또 필요 없는 말로 서로 맘을 상하게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한마딥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빼고 다른 것만 길게 한다면 대화 자체가 피곤하게 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떤 꼬마가 설거지를 하는 자기 엄마에게 달려와서 "엄마, 나 엄마를 사랑해." 하더랍니다. 엄마가 기가 막혀서 "너 사랑이 뭔지 아니?" 하고 물으니까 "나도 다 알아!" 하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다섯 살 때 한 딸의 말이 대학을 다니는 오늘까지도 잊혀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대화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사랑한다는 말을 밥해 줘서 좋고 빨래해 줘서 고맙고 용돈을 줘서 좋다는 식으로 길게 말을 하려고 한다면 말을 하는 쪽이나 또는 듣는 쪽이나 서로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냥 사랑한다는 한마디의 말과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긴말은 오히려 대화를 망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 비안네 신부님 본당에 어떤 농부가 일을 하러 들에 갈 때나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나 항상 성당에 와서 기도를 하더랍니다. 냉담자가 많고 말썽 많은 곳에서 그 농부는 참으로 보기 드문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신부님이 농부를 불러서 물었답니다.


   "당신은 일을 하러 갈 때나 또는 일을 하고 돌아올 때나 항상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합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그 농부가 하는 말이, "신부님, 저는 하느님께 뭘 얻기 위해 성당에 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님을 보고 있으면 주님도 저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 눈빛이 좋아서 늘 찾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더랍니다.


   신부님이 농부의 말을 듣고 아주 놀랐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야말로 바로 관상기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상기도는 서로 바라보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면서 듣고 느끼고 감동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갑돌이와 갑순이가 처음 연애할 때는 말이 많습니다. 취미가 뭐냐. 뭘 잘 먹느냐는 등 오만 가지 얘기를 다 나누려고 합니다. 서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성숙하다 보면 점차로 말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냥 함께만 있으면 됩니다. 말을 안 해도 눈으로 다 읽을 수 있고 이심전심이라고 느낌으로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성숙된 기도도 그런 것입니다.


   시간을 오래 나누십시오. 감사와 흠숭이 저절로 나올 때까지 충분히 마주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넷째는,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기 생각만 가지고 뭘 달라고 하는 기도는 아직도 여전히 유치한 기도입니다. 성숙한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찬미와 감사, 또는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성경을 보면 잘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루카 복음 1장 39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장면을 가지고 기도를 해 보면, 먼저 성경을 읽고 또 읽어본 뒤에 다시 그 앞뒤의 성경을 한 번 봅니다. 그러면 대강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위기와 내용을 가지고 한번 상상을 하면서 느낌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마리아가 성령의 은혜로 아무도 모르게 임신을 합니다. 그

것은 대단히 큰 비밀로 오직 성령과 자신만 압니다.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

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얘기해 봐야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도대체 시

골 처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고민이 생깁니다. 자꾸 배는 불러 오는데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임신 사실이 발각되면 자기는 이제 끝장입니다. 여러 대중 앞에 끌려 나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죽는 것보다도 더 부끄러운 것은 가문과 자기 자신의 수치입니다. 부모님이 불쌍하고 그 착하디착한 요셉이 불쌍합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마리아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어떤 돌파구가 생기게 됩니다.


   마리아에게 가까운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뒤늦게 임신하여 이제는 해산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준다는 핑계가 생긴 것입니다.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어려움을 잘 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왜냐하면 배는 불러 오죠, 임신의 징후는 자꾸 생기죠, 이제는 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때 언니를 돕는다는 구실로 자신의 남모르는 비밀을 엘리사벳을 찾아가 의논하고 싶었습니다. 처녀의 비밀을 고백하여 도움을 받는 것은 엄마나 약혼자보다도 어쩌면 언니가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남쪽의 유다 산골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찾아가지만 도움을 받기 위해서도 언니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늦도록 아기를 갖지 못해 남모르는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뒤늦게 아이를 갖고 보니 너무도 기뻤으며 그리

고 그 해산 일을 돕겠다고 사랑하는 어린 동생이 왔으니 너무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동생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엘리사벳대로 그리고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위대한 은혜의 기쁨이 마치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마리아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꺼내 언니에게 고백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처음으로 말합니다.


   마리아는 너무 엄청난 일이라 겁이 났고 또 모든 것이 왠지 의심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좀 시원스럽게 누구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언니를 찾아 말을 조심스럽게 꺼낸 것인데 이때 엘리사벳이 아주 기뻐하며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걱정하지 말고 믿어라. 나를 보아라. 누가 보든지 아기를 못 낳는 여자라고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아기를 갖게 되었잖느냐? 너도 분명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어쩐지 네가 내 집 대문에 들어설 때 내 배 속에 든 아기가 기뻐서 뛰노는 것 같더구나. 이게 어디 보통 기쁜 날이냐. 우리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자.


   그때 마리아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또 언니의 말을 통해서 어떤 확신을 갖게 되니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영감에 찬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니피캇' 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분위기를 우리가 함께 체험하면서 느껴 보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게되며, 그 은혜에 흠뻑 취하게 됩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씀드린 내용은 실제 상황과 엄청나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 성경의 분위기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우리가 보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며 또 성경의 글자 뒤에 감춰진 내용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은 들을 수 있으며,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기도하는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어렵다 해도 성경을 가지고 기도해 보십시오. 이것은 사람들이 잘 시도를 하지 않는 기도의 방법이긴 하지만 기도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기도입니다.


   다섯째는, 억지로라도 기도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열 배, 백 배 낫다는 것입니다. 대개 억지로 기도하면 무슨 은혜가 있느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형식으로라도 기도를 바치는 것하고 안 바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납니다. 예절이라는 것이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작은 상식이라도 지키는 것하고 안 지키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작은 예절이라고 지키는 것하고 지키지 않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형식이라고 어른에게는 인사를 드려야 하며 아무리 사소해도 공중 질서는 지켜야 합니다.


   이를테면 아들이 술 먹고 밤늦게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께서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걱정이 되니까 주무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늦게 들어오다가 아버지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도 술이 취했다는 핑계로 인사도 안 드리고 자기 방에 그냥 들어가 잠을 잔다면 그 자 체가 부모에게 대단히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형식으로라도 인사를 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때 아들의 인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다른 때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늦게 돌아오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며 그날 따라 유난히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절이요 그것이 상식입니다. 술이 취했다 해서 인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싫을 때, 그때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듣고 싶어 하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기도를 하는 것하고 안 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아무리 피곤하고 또는 화가 나서 기도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학교 갔다 돌아왔는데 엄마에게 인사를 안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궁금합니다. 보통 때 인사를 잘할 때는 궁금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사를 안 하고 아이가 뭘 감추려고 할 때는 엄마가 궁금해하게 됩니다. 어디가 아픈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듣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리고 그때 엄마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하느님은 늘 듣고 싶어 하십니다. 실제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래도 우리 입으로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왜 듣고 싶어 하십니까? 도와주고 싶으신 것이며 베풀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생전 처음으로 54일 기도를 했답니다. 54일 기도란 다 아시다시피, 9일 기도를 청원으로 세 번, 감사로 세 번 도합 여섯 번 하는 기도입니다. 그 형제는 여태까지 그렇게 오랜 기간을 약속헤 놓고 기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가 느낀 것이 있어서 실천을 했는데 아주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래 그 친구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도도 아내의 권유로 병든 딸을 위해서 봉헌하자고 해서 현대 의술로도 어쩔 수 없는 병이라 하느님께 진솔하게 매달리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맛을 들이게 됩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재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딸의 병도 병이지만 무엇인지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슬프게도 딸은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우리 딸이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갔다면서 오히려 고마워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기도의 은혜가 그렇게 풍성합니다.


   가끔 보면 기도가 안 된다고 않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안 됩니까? 안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꾸준히 하면 기도의 맛이 주어질 텐데 안 하니까 기도가 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밥맛이 없어도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이 유지됩니다. 먹고 싶을 땐 몽땅 먹고, 먹기 싫으면 며칠이고 먹지 않는다면 건강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또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도 학교에 가야하며, 공부하기 싫어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되며 그래야 인격이 형성되며 미래의 길이 열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귀찮아도 기도를 하는 것하고 안 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의 기도가 힘 있는 기도가 됩니다.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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