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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정호승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01 조회수790 추천수7 반대(0) 신고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정호승

   부끄럽게도 제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내가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 내 잘못을 용서해주는 주체는 타자가 아닌가, 남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설혹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저지른 게 아니라 남에게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용서해주어야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에게 청하기도 전에 먼저 나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으면, 어떻게 내가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습니까.용서의 문제를 늘 타자와 나의 관계로 생각해온 저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물론 제 자신이 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습니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지기 않은 일,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절대자를 원망한 일, 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중도에서 포기해버린 일, 뜻하지 않게 상처 많은 삶을 살게 한 일 등은 제 자신에게 퍽 미안한 일입니다. 그러나 엎드려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게 어떠한 잘못이 있을 경우, 먼저 나를 용서하는 일이 참다운 용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그것은 송봉모 신부님이 쓰신 책 『상처와 용서』에서 ‘내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글을 읽다가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에 관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스승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유다는 스스로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을 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통곡과 회개 끝에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고, 그 용서를 바탕으로 무서운 박해 가운데서도 스승의 말씀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처형을 당하게 되자 “나는 스승을 배반한 자이니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겠다”고 자청하는 위대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팔아 얻은 돈을 자신이 갖지는 않았습니다. 은전 30량을 제사장들에게 집어던졌습니다.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그러한 행위를 부추긴 제사장들에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똑같이 회개와 통곡은 있었지만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자살로 끝을 내고 만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밭을 사, 피의 대가로 얻은 것이라 ‘피밭’이라고 했으며,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했습니다.)
   이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유다는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부정적인 데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베드로는 긍정적인 데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이 두 사람의 태도를 보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다와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문득 두려웠습니다.

   중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할머니를 친 적이 있습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할머니를 부축해서 병원까지 모시고 갔습니다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득 ‘이대로 도망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발생할 모든 일이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할머니가 저를 보지 않는 틈을 타 병원 문을 열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셈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자전거만 보면 그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다고 자위해보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못된 짓을 한 제 자신이 미웠습니다. 아마 그런 미움과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운전 배우기를 꺼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때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한 제 자신을 용서합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런 행동은 하지 않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고통 받게 됩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좌절하게 되고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저는 거리의 많은 노숙자들이 노숙자가 되는 데에는 우리 사회경제의 구조적인 문제가 주원인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노숙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노숙자들을 위해 일하시는 한 수녀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노숙자들이 게으르고 의지가 약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지만 너무도 허약했어요. 폐도 안 좋고,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도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나쁜 이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일을 할 수 없고 가족들에게 민망해서 집을 나온 것이지요.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일 만큼 육체적으로 가난했어요.”

   한번은 지하철에서 손을 벌려 구걸하는 한 청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잘생긴 청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게 어디를 보아도 구걸할 청년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승객들 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무도 10원짜리 동전 한 닢 주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전동차 문이 열리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지하철역 벽에 비닐로 만든 쓰레기봉투처럼 스스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제 남에게 잘못을 저지른 제 자신에 대해 내가 먼저 용서하고자 합니다. 잘못의 주체가 나일 경우에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나 자신에 대하여, 잘못의 주체가 남일 경우엔 그 사람을 미워한 나 자신을 위하여 먼저 용서를 청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제 자신이 어둠 속에 갇히지 않게 되고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임종 무렵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왜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죽음에 이르도록 남을 용서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에 대한 용서야말로 모든 용서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내 인생에 도움을 준 한마디> 2006.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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