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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4일 야곱의 우물- 루카 19, 1-10 / 레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04 조회수502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10)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함께 루카가 전해 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곧 예수께서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기에 또 하나의 꽃이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 본문에 의하면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으며 키가 작았습니다. 예리코에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 베레아 지방 간의 교역을 감시하는 세관이 있었고, 자캐오는 그곳 책임자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주일 복음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18,9-14)와 마찬가지로 루카복음서에만 나오는 자료입니다. 둘을 연결시키면, 남몰래 가슴을 치며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 세리가 자캐오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전후관계를 또 연결시켜 보면, 18장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25절)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며 놀라자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27절)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자캐오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세관장이며 부자란 말은, 정직하고 양심적인 방법이 아니라 동족들로부터 과잉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충성하고 부를 축적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줍니다. 그래서 그는 동족한테서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양심은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물질로는 채워지지 않는 내적 공허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해 듣게 되었고 도대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리코 거리를 지나가신다는 예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루카 19,3) 키 작은 자캐오는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군중을 물러가게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작은 키를 늘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19,4) 자캐오가 앞질러 달려가는 모습,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모습이 참 천진스럽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면 또다시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에 자신의 몸을 숨긴 채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캐오의 심장은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캐오가 숨어 있는 돌무화과나무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 멈추시더니 나무 위를 쳐다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자캐오의 눈이 마주친 순간, 영원에서 준비되었던 것 같고 영원으로 이어질 것 같은 그 순간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
 
자캐오는 사람들을 앞질러 갈 때보다 더 빠르게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떤 열등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세관장으로 살면서 재물로 남들 위에 군림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려온다는 것은 땅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머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캐오에게 사랑을 주시지만 또 자캐오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자캐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사람한테는 불가능한 것이나 하느님께는 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잘잘못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그가 스스로 돌아서도록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자캐오도 승리하고 예수님도 승리합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충고라는 허울 속에 숨은 비난이나 물리적인 폭력`…. 물론 이런 방법은 잘 먹혀 들어가지 않으며 관계만 악화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눈빛만으로도,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몇십 년의 응어리를 한순간에 녹게 만드셨습니다. 그런 힘과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화두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19,9) 정말 힘 있는 선언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하셨을 때처럼 말씀의 힘이 느껴집니다.
 
자캐오의 순수한 갈망에 예수님은 감동하셨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캐오도 감동하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큰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 감탄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데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한순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군중은 예수님의 일을 보고 자주 감탄하곤 하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하였지요. 예수님의 일에 감동하였던 사람들은 그분을 저버리지 못합니다.
 
감동은 작은 것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촉촉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여 가슴에 오래 머무르게 하는 향기를 지닙니다. 감동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감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자 열망하면서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이루는 감동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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