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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 이들의 하느님" - 2007.11.11 연중 제32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11 조회수423 추천수4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11.11 연중 제32주일                                   
마카 하7,1-2.9-14 2데살2,16-3,5 루카20,27-38
                                                        
 
 
 
 
"산 이들의 하느님"
 
 


죽음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생명의 하느님뿐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없고 계속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겠는지요.
삶에 대한 감사와 소중함을 거의 상실할 것입니다.
그러니 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그 하신일 놀라워라, 주님을 찬미하라. 그지없이 크오셔라, 주님을 찬미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회색빛 우울한 인생을 기쁨으로 반짝이는 희망의 인생으로 바꿉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도 삶도 하느님 수중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삶도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은 놀랍습니다.
우리의 삶도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우리의 삶도 진실합니다.
하느님은 좋으십니다.
우리의 삶도 좋습니다.
이래서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의 영광이라 하는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축제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은 비상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단풍으로 불타오르는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수도원의 풍경,
그대로 하느님의 참됨과 좋음과 아름다움의 체험입니다.
 
이런 일상의 작고 큰 진(眞), 선(善), 미(美)의 체험은
곧장 하느님 체험에 이르고 이런 체험의 축적을 통해 진선미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어제 아침의 순간적 신비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창밖의 수도원 뜰에 떨어진 고운 단풍잎들 위에서 영롱히 빛나는 보석들이
너무나 신비로워 가까이 가봤습니다.
보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풍잎들 위에 물방울들만 있었습니다.
즉시 이 신비체험을 잊지 않고자 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영롱하게 반짝였다
사라진 임의 보석들
가까이 가보니
단풍잎들 안에 담긴 물방울들
오, 물방울들이
잠시 빛나는 태양을 담아냈었구나.
지상에서
순간의 영원한 신비체험이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어디엔가 숨겨진 오아시스 때문이고,
이 수도원이 빛나는 것은
끊임없이 수도자들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성전 때문이듯이,
우리 인생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신 보석 같은 희망을, 사랑을, 믿음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삶은 축복입니다.
죽음이 있어 온통 하느님 주신 선물로 가득한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죽음 또한 하느님 주신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동한 진선미 하느님 체험을 많이 하여
선물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첫째 의무요 권리입니다.
 
하여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에 일생 전부를 사는 것입니다.
하루를 잃으면 일생을 잃고 영원도 잃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 본 훼퍼가 형장에 끌려가면서 한 마지막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죽음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열리는 희망의 시작이 됩니다.
아름다운 단풍이 졌다하여 끝이 아닙니다.
 
이어 죽음 같은 겨울이지만 생명은 살아있어 부활의 봄을 기다립니다.
 
1년 농사가 끝났지만 다시 농사가 시작되어 이미 밭에 거름을 모두 내었고
곧 배나무의 전지가 시작됩니다.
 
어제로 끝났지만 새로 오늘을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매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신비를, 영원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희망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절망의 어둔 세상, 환히 밝히는 희망의 태양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에서 일곱 형제의 순교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셋째에 이어 넷째 역시 죽는 순간이 되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라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아무리 자연환경이 아름다워도 희망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희망이 죽음을 넘어
생명을 바라보며 기쁘게 죽음을 맞게 합니다.
 
죽음을 넘어 새 생명을 사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설명입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바로 이 천상적 삶을 앞당겨 사는 이들이
독신의 수도자들이요, 교회 안 곳곳에 숨겨진 보물들인 동정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미 세례 받아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 역시
천상의 삶을 앞당겨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이래서 연미사와 생미사입니다.
 
이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
하느님 안에서 천상에 있는 성인들,
연옥에 있는 영혼들,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깨어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복된 시간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흥겹게 시편 화답송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내 흡족하리다.”

하느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영혼의 배고픔이자 목마름입니다.

저는 여기서 생명의 강도(强度)를 묵상합니다.
 
살아있다고 하여 다 똑같은 생명을 누리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충만한 생명이요 존재이지만
멀어질수록 희미한 생명에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믿음, 희망, 사랑의 힘도 넘치지만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희미해지는 믿음, 희망, 사랑의 힘입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하여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우리의 힘을 북돋우시고 우리를 악에서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우리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는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죽음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생명의 하느님뿐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죽음 또한 하느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화가 미켈란젤로는 임종 때
“그토록 기다렸으나, 이렇게도 늦게 찾아왔다.”며 담담해 했다 합니다.

죽음은 끝의 절망이 아니라 시작의 희망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죽음을 넘어
늘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묵시1,5ㄱ.6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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