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그리스도인의 영성 / 안셀름 그륀
오늘날 영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대단히 많습니다. 이러한 기회들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가야할 영적인 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요즈음 다른 누구보다 더 나은 영성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길이 바로 하느님께 가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우리를 더욱 현명하게 하여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갖게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길은 수련을 거쳐야 하는 길입니다. 이는 수많은 난관들을 견디어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십자가를 통해 부활로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시고 생명과 자유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영적인 길은 우리를 참 하느님께로, 본래의 우리 자신에게로 인도합니다.
저는 이 영적인 길을 세 종류의 질문으로 표현해 봅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세 가지의 질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영적인 길의 본질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영적인 길이 우리가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물건처럼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란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길을 상품처럼 사서 쓸 수 있다는 듯이 선전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도처에 있습니다. 영적인 길은 우리 스스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은 우리를 그 고유의 진리로 인도합니다. 이 길을 가려면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길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며,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고자 하시는 충만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1.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성적인 문제로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모두 소진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의 샘에서 나오는 힘으로 살아가며 일하는 사람은 지치거나 소진되지 않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대로 일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성령의 샘이 솟아올라, 의욕적으로 기꺼이 일을 합니다. 영성은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자신이 곧 창의성이며 자유임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나는 세상에 의존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의 가치기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인정하는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업적을 쌓는가, 세상이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가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삶이 솟아오릅니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나를 격려하는 것은 내 안에서 솟아나는 하느님이 주신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솟아나고 있는 이 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통해서 이 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감정과 고통, 내 단점과 약점들, 생명력과 성적 활력 등을 포함하는 나 자신의 현실을 통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현실을 뛰어넘어 가려 합니다. 미국인들은 영적인 갓길, 다시 말해 영적 지름길을 얘기합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투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의 내면에 이미 성령의 샘과 같은 어떤 좋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샘이 이들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들은 두터운 콘크리트 벽에 의해 샘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의 길은 변화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 갈망과 욕구를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면했습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야만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저술가인 에바그리오 폰티쿠스는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과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일은 수도자들의 영적인 길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단계들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내보이는 부분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러한 일을 항상 체험합니다. 수도자가 기도하려고 하기만 하면, 먼저 자신의 생각과 갈망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과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들과 화해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변화시키시도록 드러내놓아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이것을 '악마들과의 싸움'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갈망과 싸우며 있는 그대로를 바라봅니다. 포이멘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갈망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나 자신을 그것들과 친숙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주의력을 집중하고 그 힘을 받아들이면 갈망은 나를 안정시키고 지켜 준다. 그러면 갈망은 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힘이 되어준다. 이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힘이 넘친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나의 삶은 하느님으로 온전히 채워지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내면의 샘으로 가는 첫 번째 길은, 수도자들이 '아홉가지 로기스모이logismoi'라고 부르는 아홉 가지의 감성적 사고 또는 갈망을 관조하며 이들과 겨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나의 갈망, 문제와 갈등들이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내가 두려움을 상대로 투쟁을 벌일수록 두려움이 키워가는 반작용도 그만큼 더 커집니다. 두려움은 그냥 놓아둔 채 두려움과 대화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나 가정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것과 대화하면, 두려움은 애당초 잘못 전제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며 나로 하여금 인간적인 태도를 취하게 해 줍니다. 내가 반드시 완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 역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외로움, 버려짐, 질병 그리고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끝까지 추적해 막다른 곳까지 가면, 그 두려움은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해갑니다. 나는 그러한 두려움과 함께 내가 하느님의 선하신 손안에 들어 있으며, 아무도 나를 그분의 손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두려움 저 밑바닥에 깊은 평화가 자리잡아 나를 채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없애버리고자 하는 시기심, 분노, 우울 등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의 두려움, 분노, 우울한 마음의 밑바닥에서 나는 성령의 샘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시면 나의 두려움과 우울한 상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요한과 바울로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역설이 성립합니다. 다시 말해 땅으로 내려가는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며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샘으로 가는 세 번째 길은 내가 동경하는 것을 철저하게 끝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고 싶고 또한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평온하기를 원하고 또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싶어하고 기쁨을 느끼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동경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영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우리에게서 결코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체험한 사랑은 결코 가물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는 데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유일무이하고 참된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 성장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동경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내면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샘으로 인도하려 합니다.
2. 나는 어떻게 사는가?
영적인 길은 명료한 형태를 취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세상과 밀착된 구체적인 영성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구체적인 생활 형태로 재구성하여 규칙적인 일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일, 개인과 공동체, 침묵과 나눔, 전례와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영적 전통은 우리의 기운을 북돋우는 종교적인 의식儀式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 영성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교회는 의식에 관해 풍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교회는 지난 50년 동안 이러한 의식들을 다소 소홀히 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을 통해 우리는 종교적 의식이 얼마나 큰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일상의 사막에서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삶의 혼돈 한가운데에 열려있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의식은 우리의 삶이 잘 이루어져 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서도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디나 성스러운 장소이며, 하느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입니다. 의식은 촛불을 하나 켜거나 어떤 몸짓을 취하는 것 같은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행위는 나와 하느님을 연결하고 하늘을 열어주며, 하느님께서 나의 일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여주고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의식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나에게 말씀을 걸어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나의 일상적인 삶을 잠시 멈추고 건강을 회복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본질적인 실재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두려움, 갈등, 도피욕구는 나에게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삶을 이끌어 주시면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자신의 고유한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상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어떤 사람은 침묵 중에 성서를 읽거나 영적 독서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이나 저녁은 이런 의식에 적합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루의 일과중에도 의식을 위해 가끔 일을 멈추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한 의식을 통해 일상생활의 갈등 대신 하느님의 치유와 사랑의 손길이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문을 닫기도 하고 새로운 문을 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을 마무리할 때 의식은 특히 중요합니다. 저녁에 행하는 전통적인 의식은 저녁기도입니다. 저녁기도는 세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나의 하루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맡김으로써 그 하루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꿈을 꾸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거룩한 천사들을 보내셔서, 내 현재 삶의 상태가 어떠하며 어떻게 영적인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를 꿈속에서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저녁기도는 나 자신을 가득한 신뢰로 하느님 품안에 맡길 수 있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열어드릴 수 있는 다양한 의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교육과정에서 배운 종교적 의식을 일정기간 동안 실행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지속하지 못하고 그만 두고 맙니다. 더 지속할 흥미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거나 강요당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내가 즐겨 행하던 종교적 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의 의식을 살펴보아 그것을 어른이 된 지금 어떻게 하면 다시 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모두 영적입니다. 각자 고유한 영성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영적인 자취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3.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잘 살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지닌 문제들을 더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영적인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길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낯설거나 과도한 것으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감정에 사로잡혀 그 안에서만 맴도는 종교적 자기도취에 빠져들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성서의 중요한 개념인 '파견'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명, 즉 과제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합당한 것인가는 그에 임하는 우리 자신의 활력과 그 결실로 판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 세상에 파견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명예에 연연하여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파견의 우선적인 목적은 많은 일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인격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는 데에 있습니다. 성서의 의미대로 말하자면 우리 각자는 세상에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각자의 삶 속에 깃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피정 지도를 하는 중에 가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까운 친구에게 글로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로만이 아니라 나의 온 존재를 걸고 전달하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내 삶을 이끄는 이상은 어떤 것입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매일 아침 일어나 일터로 갑니까? 어떤 생각이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합니까? 나는 세상에 어떤 자취를 남기려 합니까? 세상에 우리의 고유한 자취를 남긴다면,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안위에만 골몰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자취를 남긴다는 것은 삶의 목적을 묻는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답변입니다. 두 번째 답변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담겨 있습니다. 나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무엇입니까? 내가 다가가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는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상상력이 초점입니다. 영성은 상상력 및 창조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안에서는 삶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과제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면 또다시 무엇을 성취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직하는 일에 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 줍니다. 또 남에게 용기를 불어넣거나 감동을 잘 받는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가 어떤 능력을 선사받았는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 사명을 주어 파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항상 두 사람씩 파견하셨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만 한다면 그 일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일은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 용서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시는 일은, 용서하고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화해는 끊임없이 스스로 체험해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늘 화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힘든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화해의 누룩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영적인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며, 화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화해를 가져오고 세상의 불화를 치유할 영적인 길을 걸어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지금까지 여러분께 드린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영적인 길을 어떻게 걸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교적 삶의 길이 어떤 이유로 언제나 두 사람씩 함께 걸어가는 길인가를 드러내는 몇 가지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걸어갈 수 있는 고유한 내면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가야 하며,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위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휴머니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면서 현재 이곳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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