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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이 내리시면... ... 차동엽 신부님 **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04 조회수980 추천수7 반대(0) 신고

 

 

 

 

시방 세계는

  TV를 보다가 당황스러워지는 일이 제법 생긴다.

  대학생들에게 1000만원 행운권이 당첨되면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그 중 몇 명이 대뜸 “성형수술할거예요”라고 답한다.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즉각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한 10억 쯤요”라고 답한다. 대부분 앵무새처럼 같은 말로 답한다. 남자고 여자고 배포가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사람으로는 단연 연예계 스타 아니면 스포츠 스타들이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서점, 헌책방, 복사집 등이 즐비하던 대학가들이 요즈음엔 미장원, PC방, 술집들의 거리로 바뀌어 있다.

  

  젊은이들의 염려스런 모습을 확대경으로 당겨서 보아 봤지만, 사실 우려스럽기는 기성세대라고 결코 나은 형편이 아니다.

  얼마 전 의정부 교구 출범에 즈음하여 초대 교구장 이한택 주교님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현안문제로 도덕과 질서의 실종을 꼽으셨다. 혹시 모두가 경제와 정치가 문제라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이 무슨 엉뚱한 얘기인가’ 하고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하겠다. 하지만 주교님은 사태의 핵심을 보신 것이다. 사람들이 현상에 집착하고 있을 때, 주교님은 현상의 근원적 원인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안목(眼目)이 있는 이에게는 곧바로 문제의 정곡(正鵠)이 보이는 모양이다. 구상 시인(1919-2004)은 오늘을 살고 있는 동시대인(同時代人)의 처지를 ‘칠흑의 어둠’이라고 잘라 말한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인류의 맹점(盲點)에서’에서)


무엇을 찾아야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불현듯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었느냐?”(루가 7,24, 직역).

  공동번역은 ‘구경하러’로 되어 있지만 ‘보러’가 맞다. ‘구경’은 볼거리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보러 간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을 말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시적인 운율로 이 물음을 던지신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이 물음은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갔었는가? 무엇을 찾아 우리는 ‘도시’라는 광야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21세기 ‘문명’의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였는가? 서풍이 불면 서양의 인기 문화에 흔들거리고, 남풍이 불면 일본의 유행 상품에 휘청거리는 세상의 재미를 찾아서였는가? 오는 듯이 가버리는 그런 허무한 것들을 찾아서였는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었는가? 멋지게 차려입고 굳이 뽐 한번 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허영이었는가?

  이런 것쯤이야 권력을 갖게 되면 의당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마음껏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었는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생들인가? 도대체 우리는 왜 가톨릭 신자인가? 주일이면 남들은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우리는 무슨 심산으로 성당을 다니는 것일까?

 

 

  예수님의 질문은 깊이 헤아려 보면 행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아야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까? 20세기 전반기 세계 심리학계의 요람이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학파는 3대에 걸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집요하게 찾아 나섰다. 

  제1대 지그문트 프로이드(S. Freud)는 인간을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쾌락은 성적인 쾌락이었는데 그는 이러한 성적인 쾌락의 욕구가 인간 본연의 욕구로, 이것을 빼면 인간의 자아는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게 되면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이러한 관점을 좀 더 확대시켜보면 그의 주장은 결국 인간이 생리적인 욕구의 충족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얘기와 상통한다. 즉 식욕과 성욕, 수면욕(주거) 등을 충족시키면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제2대 아돌프 아들러(A. Adler)는 스승인 프로이드의 주장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쾌락을 향한 의지’를 지녔다는 프로이드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그 심층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가 더 원초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쾌락에의 의지는 심리의 표층에 자리잡고 있는 욕구일 따름이고, 그 속을 다 헤집고 들어가 보면 ‘권력에의 의지’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 높은 자리를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더 큰 권력을 차지할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아들러는 주장한다. 실제로 아들러의 주장에 편승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3대 빅터 프랑클(V. Frankle)은 인간의 원초 욕구는 다름 아닌 ‘의미에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쾌락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는 ‘의미를 향한 욕구’라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충족되어도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앞의 두 가지가 결여되어도 의미를 향한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의미’라고 하는가? 그것은 관계에서 발견되는 존재의 보람을 말한다. 아,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 내가 있음으로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고 내가 있음으로 세상이 좀 더 밝아질 수 있다는 생각,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 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 이런 느낌과 생각들이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성령이 내리시면

  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는 3천명이 넘는 대중 앞에서 첫 강론을 한다(사도 2, 14-32). 그의 강론 주제는 요엘서 3장의 ‘약속 말씀’이었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사도 2,17: 요엘 3,1-3 참조)

  ‘예언’이 무엇인가? ‘계시의 영상’이 무엇인가? ‘꿈’이 무엇인가? 이들은 표현이 다를 뿐 모두가 하나로 모아지는 같은 내용의 단어들이다.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다. 그러니 이 약속 말씀은 성령이 내리면 아들 딸, 젊은이, 늙은이 모두가 내일을 향한 부푼 희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오늘 이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모든 이에게 고루 내려오는 성령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 안에서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아들딸’들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허무를 얘기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이들은 의미를 얘기하고 눈을 들어 멀리 내다본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늙은이’들은 다르다. 세상 노인들이 은퇴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고독과 소외감에 움츠러들고 스러짐과 죽음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을 뒤척일 때, 이들은 새 출발, 귀의, 영원한 삶에 대한 꿈을 노래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젊은이’들은 다르다. 세상 청년들이 고작 좋은 학벌, 안정된 직장, 출세, 시집장가 가는 일 등등 온통 ‘땅의 꿈’을 꾸고 있을 때, 가치, 보람, 의미를 추구하며 ‘하늘의 꿈’을 꾸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점치고 부적을 들고 다니고 할 때, 이들은 기도 가운데 굳건하게 서 있다.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는 인생이 더 이상 우울하고 초라한 인생이 아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벅찬 감격으로 고백한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27 참조)

  “우리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고린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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