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25 조회수793 추천수13 반대(0) 신고
 
 
2007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해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Jn.1.14)

 

제1독서 이사야 52,7-10
제2독서 히브리서 1,1-6
복음 요한 1,1-18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아기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4주간의 대림시기를 마치고 맞이하는 이 성탄이 어떠하신지요? 정말로 기쁘세요? 정말로 가슴 깊이 와 닿는 예수님의 탄생인가요? 아마도 12월 한 달 동안의 대림 기간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보내신 분은 그 기쁨이 누구보다도 클 것이고, 반대로 연말이라는 이유로 정신없이 보내신 분은 남들이 기쁘다고 하니까 그냥 기쁘다고 말할 뿐이 아닐까 싶어요. 즉, 분위기에 취해서 기쁘다고 할 뿐이지요.

아무튼 분위기라도 즐겁고 신나는 날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큰 소리로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눕시다.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오늘,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묵상을 하여 봅니다. 우리 죄 많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하느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모두 안고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래서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우리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는 평범한 아기의 모습으로 그래서 탄생과 동시에 ‘응에~ 응에~’하고 우는 것은 물론, 똥오줌도 아직 못 가리는 모습으로 오셨지요. 하느님이 이렇게 낮은 곳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지요.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아니 인간보다도 더 큰 고통과 시련 속에서 생활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계속해서 착각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는데, 끊임없이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올라가지 못함을 주님께 원망과 불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어요.

약속 장소에 나온 친구의 모습이 너무나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여보게, 표정이 왜 그런가? 자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나?”

“난 지금 아무 것도 말할 기분이 아니라네. 내 인생에는 희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네.”

그가 왜 그러는지 더욱 궁금해진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 도대체 왜 그러나? 무슨 슬픈 일이 있기에 자네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가?”

그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1주일 전에 삼촌이 돌아가셨네. 내게 3억 정도 유산을 남기시고 말이야.”

친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 그 많은 재산을 상속 받았어?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어제는 우리 작은 삼촌이 돌아가셨지. 5억 정도의 유산을 남기시고 말이야.”

친구는 도대체 왜 그런지 머리가 다 혼란해졌습니다.

“혹시 자네 지금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네는 지금 8억 이상을 상속받았어. 그런데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넨 행운의 사나이란 말일세.”

그는 고개를 숙이며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내게 그런 유산을 줄 삼촌이 없다는 사실이네.”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족함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욕심에서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책에서 인간이 성숙하는 단계를 적은 글을 보았습니다. 그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산타클로스를 믿는다.’, 둘째는 ‘산타클로스를 안 믿는다.’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산타클로스가 된다.’라고 하네요.

실제로 남을 도우면 기쁨을 얻는다고 하네요. 미국 오리건대학 연구팀의 실험결과, 사람들이 100달러를 푸드 뱅크에 기부한 순간 뇌 속 즐거움의 중추가 활성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욕심은 약간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내 몸을 위하고, 내 영혼을 위한 것은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한 베풂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 역시 당연히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성탄 축하 인사를 나눕시다.




포도 이야기(‘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느 추수철이었다. 떠돌이 장님이 포도밭 옆을 지나가는데, 마음씨 좋은 농부가 측은한 마음에 포도 한 송이를 따서 주었다. 장님은 길잡이 소년과 함께 포도를 나눠 먹기로 했다.

“번갈아 가며 한 번에 하나씩만 먹는 거야!”

장님은 소년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아 냈다. 장님 한 알, 소년 한 알, 장님 한 알, 또 소년 한 알. 그런데 갑자기 장님이 두 알을 따 먹는 것이었다. 그 순간 소년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먼저 반칙을 했는데, 나라고 바보같이 손해 볼 수는 없지. 앞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내가 몇 알을 먹었는지 어떻게 알겠어?’

슬그머니 소년은 포도 두 알을 먹었다. 그런데 장님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번에는 한술 더 떠 세 알을 먹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포도가 순식간에 없어지고 말았다.

포도를 다 먹은 뒤 장님이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속였구나. 정직하지 못했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만약 네가 나를 속일 마음이 없었다면 내가 두 알을 먹었을 때 뭐라고 말을 했을 거야. 그런데 너는 잠잠히 있었어. 그게 바로 나를 속인 증거야.”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만큼 비겁한 일은 없고, 타인의 잘못을 본보기 삼아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하는 것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 E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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