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12.26 수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사도6,8-10;7,54-59 마태10,17-22
"하늘 본향"
오늘 아침성무일도 두 번째 후렴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으며 그리로 들어갔도다.
열린 하늘을 보는 이는 행복하도다.”
많은 이들이 현실에 매몰되어
하늘의 신비를, 초월적 삶의 기쁨을 잊고 삽니다.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던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의 삶은
늘 하늘과 연결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지상에 살지만 그의 본향은 하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하늘 본향은 하느님이십니다.
다음 스테파노가 본 환시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외에도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에 대한 암시는 많습니다.
“갈 곳은 많은 데 갈 곳이 없다.”는 흔히 듣는 진심의 토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는 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시에 나오는 구절,
“가정에서의 향수(homesick at home)"라는 어느 수도승의 역설적 말마디,
“나는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았다(I am from nowhere)”는 어느 수녀님의
화두와 같은 대답,
“미사 없이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느냐.”는 양로원 할머니들의 고백 등
한결같이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을 암시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많은 발걸음들 역시
본향이신 하느님을 찾아가는 모습들입니다.
히브리서의 다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믿는 모든 이들
하늘 본향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며 나그네입니다.
이런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삶이 저절로 세상과 거리를 두게 합니다.
초연과 이탈의 초월적 기쁨과 자유,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바로 이게 가톨릭교회의 전례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여기 제대와 성탄 구유는 우리의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을,
또 영롱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추리는
우리 영혼의 초월적 기쁨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우리 영혼을 미사전례와 더불어 끊임없이 하늘 본향으로 들어 올립니다.
이런 초월적 기쁨과 자유의 체험이 없으면 저절로 끝없는 세상에의 집착입니다.
세상 것들에의 집착에서 파생되는 온갖 부자유, 두려움, 불안입니다.
늘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온갖 현세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도 그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분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하느님 안에서 초월적 삶을 사는 이라야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끝까지 견뎌내면서 현세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게 믿음의 삶이자 구원의 삶입니다.
스테파노의 마지막 임종어는 그대로 주님 안에 살았던 평소의 삶을 반영합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우리 역시 매일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 때, 즈가리야의 노래 후렴 역시 참 은혜로웠습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에게 천국 문이 열리고 그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도다.”
스테파노는 물론 모든 순교적 삶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주님의 보답입니다.
나름대로 힘겹게 순교적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천국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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