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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가정 공동체" - 2007.12.30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성화주간)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30 조회수536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12.30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성화주간)
                                                              
집회3,2-6.12-14 콜로3,12-21 마태2,13-15.19-23 

                                                      
 
 
 
 
"성가정 공동체"
 


성가정 축일의 미사 화답송 후렴은 해마다 부를 때 마다 참 좋고 흥겹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이 연말연시 가정성화주간에 끊임없이 화살기도로 바치기기 바랍니다.
 
여기 수도원만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이들의 집 모두가 주님의 집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각자 주님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저희 요셉수도원 수도 형제들 모두는 주님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공동생활입니다.
하여 수도가정 공동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과 고립 단절된 공동체가 아니라
앞문은 세상의 이웃에,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있는
수도가정 공동체입니다.

그대로 믿는 이들의 가정 공동체의 원형과도 같은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성가정 역시 선택입니다.

객관적 좋은 여건에서 행복한 성가정이 아니라,
주관적 의지와 결단에 달려있는
순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의식주 생활 풍요로워도 불행한 가정들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의식주 생활 빈약해도 행복하게 사는 성가정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보셔요.
얼마나 가난하고 불안정 되어 보입니까?
 
주님의 천사의 지시를 받아 헤로데를 피해 계속 처자식을 이끌고 피난길에 오르는,
파란만장한 요셉의 성가정이 아닙니까?

바로 여기서 귀중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
비로소 성가정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성가정 공동체요,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성가정의 행복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으니
아무도 탓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때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어야
세상 바다에서 공동체라는 배들 파선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천사의 인도 하에 이집트의 피난 여정에 올랐던 요셉 가정은
헤로데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인 갈릴리아 지방 나자렛 땅에 무사정착합니다.

헤로데가 상징하는바 성가정의 장애물과도 같은 온갖 암초들을 뜻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크고 작은 장애물들 얼마나 많은지요.
헤로데를 제거하지 않으셨듯이 주님은 절대로 장애물을 없애주지 않으십니다.
 
장애물의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찾게 되고
내적으로 성숙 성장 되는 개인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헤로데와 같은 장애물들
우리를 단련, 성숙,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일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지닌 헤로데도
주님의 천사의 인도를 받는 요셉 가정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표면상으로야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이지만,
안에서 보면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이니 이미 승부는 결정된 것입니다.

성가정의 행복은 순전히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렸습니다.

성가정 공동체의 원리는 모든 크리스천 공동체의 보편적 원리이기도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성격이 같아서 마음이 맞아서 공동체의 일치라면 그 일치는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야 하고 바로 이 중심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무릅니다.
 
사도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간곡한 권고를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때
카오스의 혼돈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수도원의 평화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평화이고
이 평화를 찾아 무수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리스도의 평화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부히 머물 때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이래서 말씀 공부의 생활화가 필수입니다.
말씀 공부를 통해 우리 안에 풍성히 머무르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둘째,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총 아닌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감사할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평화가 감사의 원천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은총과 감사로 가득 찬 삶임을 보여줍니다.
 
감사할 것 찾아 보셔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감사할 때 행복이요 빛 속의 긍정적 낙관적 삶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믿고 사랑할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하여 우리가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 모두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간곡한 권고 말씀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감사하는 것 역시 우리의 선택이요 의지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때 행복과 축복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셋째, 인내와 용서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인내와 용서의 노력 없이 되는 성가정 공동체는 없습니다.

모든 수덕의 열매는 인내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때가 이를 때 까지 기다리는 인내요 끊임없는 용서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의 여정은 인내의 여정이자 용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인내해야 하고 숨 쉬듯이 밥 먹듯이 용서해야 합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공동체도 삽니다. ‘살기위해’ 인내요 용서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인내와 용서의 비결이 밝혀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인내해주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기에
우리는 인내와 용서에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와 용서의 원천이 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베네딕도 규칙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십시오.”

형제의 약점을 지적하여 고쳐주라 하지 않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합니다.
약점의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깰 수 있기 때문이요,
단점의 가라지를 뽑으려다 장점의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사랑과 순종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맹목적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사랑할 때 저절로 순종입니다.
모든 수덕 행위들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무엇보다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옷 입듯이 사랑을 늘 입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방적인 사랑과 순종이 아니라 상호 사랑과 순종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비단 부부 관계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내 인간관계의 핵심이 사랑과 순종입니다.
 
사랑의 진정성은 순종을 통해 입증됩니다.
나이 적은 자녀나 후배라도
사랑하고 때로 순종할 때 부드러운 신뢰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노인 문제가 날로 심각하게 대두되는 오늘의 시대에
1독서 집회서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끝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 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효자, 효녀 보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 노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사랑이 진짜 순수한 사랑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 받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이들 치고 못사는 사람, 자녀 문제로 속 썩는 사람 하나도 못 봤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어려움도 해결되고,
아이들도 부모를 보고 배워 착실하고 충실히 생활합니다.
 
부모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는 자녀들입니다.

성가정 공동체의 행복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렸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의식주 풍요해서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 행복한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이 머무르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 늘 감사를 드리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인내와 용서, 그리고 사랑과 순종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깨달아 시작하면 늦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성가정 공동체를 살도록 합시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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