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 양승국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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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7-12-30 | 조회수745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요한 1장 1-18절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
고은 시인의 ‘하루’란 시를 읽으며 떠나가는 한해를 뒤돌아봅니다.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 것 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발 자옥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神)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 또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계속해서 시들지 않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한해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결론을 내릴 무렵에야 하느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매달려있군요. 다들 우여곡절의 한해를 보내고 나서 지난 날을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하겠지요.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많이들 흔들리겠지요.
이런 날은 석양 무렵에 맞춰, 엄청난 새떼가 군무를 추는 철새도래지라도 다녀오면 제격이지요. 그도 아니라면 낙조를 구경하러 가까운 서해안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날입니다.
어르신들께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한해의 끝에 서니 희망보다는 회한이, 가슴 두근거림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게 나이를 먹어가는 징조겠지요. 요란스럽게도 이 곳 저 곳에 잡다한 흔적만 많이 남겨놓았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본 지난 한해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제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한해의 끝에 선 우리가 결국 해야 할 일은 감사하는 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입니다. 결국 올 한해의 결론은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지난 우리의 한해를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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