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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왜 교회는 새해 첫날을? 예수님축일이 아닌 성모님축일로?
작성자허윤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03 조회수628 추천수3 반대(0) 신고
 

* 왜 교회는 새해 첫날을?

 

 

왜 교회는 새해 첫날을 즉 태양력의 첫날을 예수님의 대축일로 하지 않고 그의 모친 성모마리아의 대축일로 선포하였을까?

특히 성모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 성모마리아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을까?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선포하였다. 공의회 결정문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포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분명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임마누엘이 참으로 하느님이고, 그래서 거룩한 동정녀가 하느님을 낳으신 분(왜냐하면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육화하신 말씀을 육에 따라 낳으셨기 때문이다)이 아니라고 고백한다면 파문될지어다”(DS 252). 칼체돈 공의회(451)는 이런 에페소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의 의견에 따라서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자 하는 바이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 세기 이전에 성부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러나 같은 그분이 인성에 있어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다”(DS 301).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치 마리아가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현존하는 모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인 성부(聖父)를 낳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 칭호는 에페소 공의회의 지향에 따라서 철저히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강생하신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느님이고, 그분의 신적인 본성이 인성과 결합됨으로써 소멸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신적인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낳으셨고”, 그에게 인간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신성과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낳음으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는데, 이런 마리아의 모성을 단지 생물학적-육신적 측면에서만 주목해서는 안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예”라는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고대교부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Maria prius concepit mente quam ventre).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셨고 그 다음에 비로소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신앙적 순종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간파한 것은 고대교회 교부들이었다. 그들은 마리아의 신앙적 순종에서 하와의 불순명으로 야기된 비구원의 상황을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고 보았다. 그래서 리옹의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와의 불순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주었고,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Adv. Haer. III 22,4). 또한 교부들은 마리아가 그녀의 신앙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전형이며 첫 번째 실현이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이런 유형론적 생각에 기반을 두고서 마리아의 모성을 교회의 모성에 대한 원형으로 간주하였다. 즉 마리아가 믿음과 순명으로 성부의 아들 그리스도를 출산함으로써 어머니가 되셨듯이, 교회도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출산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는 어머니가 된다(교회헌장 63-64항 참조). 이렇게 볼 때 마리아의 모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어야할 것이다. “마리아는 그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사명으로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데에 협력하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시었다”(교회헌장 65항).

일부 여성신학자들이나 특정한 영성적 전통에 뿌리를 둔 신학자들은 여인인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차원”이 직접적으로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자식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참조: 민수 11,12; 이사 49,15; 66,13)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성서의 증언이 교회의 복음 선포에 너무 적게 반영되었고, 그래서 이런 차원의 종교적 체험이 마리아 공경과 밀접히 연결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상은 흔히 생각하듯이 가부장적(家父長的)이 아니라 여성적인 특색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굳이 마리아라는 우회로(迂回路)를 거칠 필요가 없다. 마리아는 유다 여인으로서 전적으로 인간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모성적 얼굴”을 대신하거나 “하느님의 여성적 차원”의 계시도 아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동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적) 로고스가 육화되었고 마리아 안에서는 (여성적) 영(Ruach) 혹은 지혜가 위격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시도라고 하겠다. 삼위일체 신학적 전통이 이런 식으로 와해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는 마리아에게서 다른 모든 인간의 삶에서 가능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동적이고 실제적으로 작용하였다. 마리아는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과 위격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영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예정되거나 선택된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말씀이 육화되기 위해서 인간의 협조를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부름에 대해서 인간의 응답을 모범적인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은총의 도움 속에서 이런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할 수 있는데, 마리아는 이 응답을 인간을 대표해서,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과 영, 지혜에 대해서 자신을 개방하기를 원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희망의 표징이라고 하겠다.

교회가 그의모친 마리아를 이렇게 공경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고히 하며 그의모친 마리아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내에서 마리아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구 대교구 시노드 조사에서 비신자 62.7%는 종교를 가질 경우 천주교에 입교하고 싶다고 말했고 천주교의 부정적 요인으로 32%가 여인 마리아를 믿는 우상숭배를 한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사실 한국 천주교의 신자들의 성모마리아에 대한 사랑은 세계적인 수중이다.

하지만 성모마리아에 대한 교리와 영성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정확한 가르침에 서적이나 교육이 부족한 현실이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를 마리아의 교회라고 표현하며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우상숭배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표현은 한국에서만의 상황이다. 외국 그 어디에가도 그 나라의 개신교가 그나라의 천주교를 그렇게 표현하고 가르치는 나라는 없다.

구교인 천주교와 신교의 개신교의 분화 과정에서도 루터와 칼벵의 신학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교리와 공경은 천주교의 것과 다름이 없음을 그들은 천명하였다.

남을 오도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을 얻는 다면 그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그 어디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마리아는 신앙의 모범이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받으셨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도 책임이 있다.

비신자들이나 개신교들인들이 잘못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 그것을 잘 이해시켜주어야 한다.

그 이해 시키기 위한 노력은 중요하고도 필수적인것이다.

오도의 전파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더 신속한 바로잡음의 속도가 필요하다.

난 2008년 1월1일 자정 사도신경을 봉헌하며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나시고”라고 하는 부분에서 하느님께 허리를 숙여절했다.

미사경문에 보면 사도신경의 내용중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나시고"부분을 빨간 불로 긋고(  )안에 깊이 절을 한다고 이문장만을 유일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전통은 그리스도교 초대교회때부터의 것이다.

이부분에서 즉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부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인 놀라운 육화의 신비와 그의 신비가 이루어지기 위해 신앙의 응답을 보여주신 마리아에게 공경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새해 첫날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예고에 대해 ‘예’라고 응답한 그 희망과 믿음의 모범을 기념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이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예”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간직하도록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해의 첫날을 가질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희망적 관계성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라는 말을 한다. 12월 31일 운동장에서 한 신자들 만났다. 신학생때 본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자매였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지? 기도도 잘하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뭇거리며 답을 하지 못했다. 쓴 웃음을 지었다.

“복을 비는 바램은 가지면서 복을 누가 주는지? 어떻게 하면 그복을 주시는 분으로부터 받는지에대한 생각은 전혀 못하는군!”

“복을 줄수 있는 것은 하늘이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지! 그리고 하느님은 사제를 통해 강복해 주시지! 넌 지금 하느님을 잊어버리고서 복을 비는 것만 기억하고 있구나!”

 

* 그리스도와 교회를 모르는 이들은 그럽니다. 떠오른 태양 해맞이를 하며 자신의 소원을 빕니다. 그것을 문화 혹은 풍습이라고 합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났죠!

하지만 왜 정말 사람들은 복을 받는 염원만 생각하고 그 복이 어디서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 분석은 하지 않거나 잊어버리는지?

 

새해복많이 받으셔요라는 문자를 수천통받았죠!

 

그복 정말 다 받을수 있을까?

새해만이 아니라 매일 우리는 복을 빈다. 늘 복을 비는 마음이 되고 늘 그복이 어디서 부터 오는지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것이며 어둡고 힘들때 바램이 아니라 응답인 "예"가 기도이자 신앙이다.

기도는 하소서! 해주조서! 비나이다! 이전에 "예"라는 응답이다.

 

출처 :허신부 홈피 http://credohu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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