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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증언하였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03 조회수544 추천수4 반대(0) 신고
 
 
 

<내가 증언하였다> ... 윤경재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29-34)



예수님께서 공생활하시기 이전에 유대 땅에서는 회개 운동이 전개 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이 고난 받는 이유를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 해서 발생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바빌론유배에서 귀환 이후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대사회는 종교 활동이 외적 활동보다는 내적으로 묵시문학이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카베오 시대가 되자 잠시 독립을 쟁취란 틈을 타 정치권력이 대사제 역할까지 맡으려 들었습니다. 순수 종교 세력은 이에 반항하거나 동조하는 등 분열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파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에세네파,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가 그들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정치권력의 부조리에 항거하여 광야로 숨어들었으며,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는 정치권력이 대사제를 겸하는 것을 시대조류라고 인정하고 현실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종교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자연스럽게 이들 모두를 비판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새로운 신앙운동이었습니다. 평민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새롭게 예언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활동은 침례를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증표로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표징으로 물속에 전신을 담갔다가 꺼내는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여태껏 유대 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조이었습니다.


그런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앙운동은 예수 탄생이전에 시작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탄생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한 유파를 존속했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두 종파 간에는 갈등이 있었던 같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공생활 이전에 이 침례파 운동에 가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활동도 얼마간 집행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예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침례파와는 달리 사회로 직접 찾아가 설교도 하고 여러 가지 표징을 일으키는 활동을 보였습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신앙 혁신운동을 꾀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활동은 이전의 어떤 예언자들이 보여 준 활동과는 차별화 된 것입니다.


제일 큰 차이점은 각 세력 간에 분별을 없앴다는 점입니다. 죄인으로 치부되었던 부류를 아우르는 정신이었습니다. 예수이전에는 소수의 선택된 부류에게만 신앙의 문을 열었으나 예수는 모든 부류에게까지 문을 열었습니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 신분의 차별을 없애 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었습니다. (시로 페니키아의 여인)


무엇 보다 특별한 차이는 그분의 언행일치에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말에 반드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즉 표징을 일으킨 것입니다. 소위 기적과 같은 사건들이 무수히 벌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기적을 표징이라 말하여 이 이벤트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구체적 행위로 본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신앙의 표징으로 본 것입니다. 그 표징이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성사로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독특한 모습을 지켜본 세례자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아, 어느 면에서는 제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無心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뛰어 넘는 인간 예수에게 어떤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오실 분’인지 여부를 재차 물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 말씀을 이런 역사적 정황에서 이해한다면 보다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겁니다.


요한은 예수라는 인물이 자기를 뛰어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어쩌면 자기 문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까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에게서 유다 민족을 노예상태에서 구해줄 어린양 역할을 할 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점은 누구도 몰랐던 아주 독특한 안목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사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하느님의 표징을 읽어낸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고 인식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전에 어렴풋하게 알려져 있었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걸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도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또 하나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세례가 굳이 필요 없으셨던 예수님마저도 세례를 통한 성령의 내림을 거쳤다는 점은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합니다. 교회를 통한 성사의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또 다른 사람들도 세례 받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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