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길 신부(청주교구 봉방동 천주교회)
◆어느 주일 저녁 옆 본당 동창 신부에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 앞에 막 다다랐는데 맞은편 교회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성당 다니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는 저녁 예배 보고 오는 길인데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목사님 말씀은 은혜가 넘치고 우리는 구원받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에 깔린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시작된 심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3,9) 반면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1,27)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지나친 공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싸구려 구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고 계신다. 너무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선포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바람이 채워지는 ‘기적’만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4,42-44 참조). 그들에게 ‘이미’와 ‘아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가끔 ‘신부’인 나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신자들이나 어려워 말도 못 붙이는 이들을 보면 낯이 더 뜨거워진다. 내 모습은 그게 아닌데 신자들은 너무 ‘완벽한 신부’로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는 없다. 성소의 씨앗을 잘 가꾸고 또 사제로서 열심히 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사제는 수품을 통해 ‘이미’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인생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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