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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의 빛, 내 구원" - 2008.1.27 연중 제3주일(해외원조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27 조회수424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1.27 연중 제3주일(해외원조주일) 
                                                                
이사8,23ㄷ-9,3 1코린1,10-13,17 마태4,12-23

                                                        
 
 
 
"나의 빛, 내 구원"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나는 수도자의 하루입니다.
수도자만 아니라 진정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하루도 똑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하루를 여는 우리들에게 빛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둠 속을 걷던 우리들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마치 어둔 밤을 밝히며 환히 떠오르는 태양 빛 같은 주님의 빛입니다.

대낮 같이 환한 문명의 세상이라지만 내면은 온통 어둠입니다.
참 빛이 아닌 거짓 빛들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눈 뜬 장님들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의 즈불룬과 납탈리 땅인 우리 삶의 자리를 환히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방금 화답송 후렴이 참 좋았습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로다. 내 구원이시로다.”
이 주님의 빛이 삶의 우울과 허무, 무의미와 절망의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시니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기뻐합니다.
 
연중 3주일인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 삶의 여정을 새롭게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번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시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이미 왔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에
  분발하여 일어나도록 하자.
  그리고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도록 하자.’
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할 때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합니다.
 
막연한 회개도, 한번으로 끝나는 회개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향해 사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하느님께로,
절망의 세계에서 희망의 하느님께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하느님께로 전환이 회개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리, 제정신을 찾아 제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를 잃고 뿌리 없이 불안과 두려움에 들떠 살아가는지요.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살다보면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나를 잊고 위태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는 곧장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참 나를 찾게 되고 하느님을 잃으면 나도 잃게 됩니다.
그러니 참 나를 살기위해서 평생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두 번째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습니다.”

회개로 마음의 눈 열렸으니 마음의 길눈도 밝아졌습니다.

정중동이란 말도 있듯이 우리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 역동적인 내적여정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즉시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게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 합니다.
안주의 삶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과연 안주의 삶입니까?
부단히 주님을 따르는 내적여정의 삶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놓인 무수한 길입니다만,
우리 모두가 따를 생명의 길은 주님의 길 뿐이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우리를 유혹하는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을 따르는 내적여정의 길은 사람마다 다다릅니다.
굳이 남의 길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고유의 길을 묵묵히 주님 따라 가면 됩니다.
 
이래서 외롭고도 고독한 길입니다만 축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축복이다.”
모두가 똑같이 특색 없는 하나의 길뿐이라면 얼마나 단조롭고 힘들겠는지요.
 
함께 가면서도 홀로 가는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혼자 가기는 힘든 내적 여정입니다.
눈에 보이는 도반이, 길동무가 필요합니다.

내적여정의 길은 다 다르지만 보이는 도반들 있어야 힘과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습니다.”

내적여정에 충실하다 보면
저절로 우리의 삶을 통해 낚인 도반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논어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덕불고 선의인(德不孤 鮮矣人)”
‘덕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함께하는 좋은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내적여정의 길은 자명하지 않습니다.
찾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환상이나 허영, 탐욕의 안개가 시야를 가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여 늘 깨어 맑은 눈 지니고 살아야, 마음의 길눈 밝아져
결코 길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가 내적여정의 참 좋은 이정표입니다.


세 번째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공동생활에서 가장 안 좋은 것이 한 색깔의 획일화요 제각기의 분열입니다.

이 둘 다 공동체를 고갈시키고 위축시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두 위험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다양성의 일치가 이상입니다만 쉽지 많은 않습니다.
지금도 만은 공동체들이 분열의 고통을 격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개탄하는 고린토 교회의 현실도 그러했습니다.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게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라 패거리 집단일 뿐입니다.
 
공동체의 분열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로 좋습니다.

왜 공동체의 분열입니까?
함께 바라보는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여기 우리 수도 공동체 형제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일치가 아니라,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기에 일치입니다.
 
평생 끊임없이 하루에도 여덟 번 성당에 모여
모두가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께 눈을 맞추기에 말 그대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각자의 개성도 자유도 전혀 손상되지 않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입니다.
 
삶의 자리와 색깔, 모습은 다 달라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기에 비로소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하나 되어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이자 내 마음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
저절로 뒤따르는 공동체의 분열이요 자기의 내적분열입니다.


우리 삶의 내적여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평생을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입니다.
평생을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모두가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회개와 추종과 일치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내적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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