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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3일 야곱의 우물- 마태 5, 1-12ㄴ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03 조회수428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12ㄴ)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몇 년 전 대학원 후배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함께 공부하던 동기 예닐곱 명이 송별회를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참행복 선언 문구가 적힌 고운 엽서를 가져와 서로에게 어울리는 것을 뽑아 기념으로 나눠 가졌는데, 그때 제 몫으로는 ‘온유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다들 저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라며 부러워했지만, 내심 머릿속으로는 삐딱한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도 내가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며 자기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지?’라고요. 그땐 자신의 변신을 꾀하는 데 몰두해 있던 터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 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으로 꼽은 여덟 부류의 무리 가운데 어느 하나 제가 변신하고 싶은 모습은 없었습니다.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행복하여라, 능력 있는 사람들!
하는 일마다 척척 이루어져 만인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
남들 눈치 보는 일 없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결단력 있는 사람들!
만사가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먹고살 걱정 없는 사람들!
굳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시간이 많은 사람들!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건강한 사람들!
나처럼 위장병·목 디스크·알레르기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고 싶고 그 행복을 위해 가지고 싶고 되고 싶은 게 많았으나 의외로 여덟 가지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고심했건만 이건 행복 선언이 아니라, 피해의식과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불행 선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글로 적어놓고 보니 주변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잘살아 보겠다는 심보일 뿐 오히려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인의 부러움을 사면 뭐하나,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먹고살 만하다고 걱정이 없을까,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도 지루하겠지, 늘 건강하다면 건강이 소중한 줄이나 알까 등등,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습니다. 분명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한 것임에도 불평과 한탄·텅 빈 느낌은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참행복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미 시편에서도 여러 차례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32,1­2),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 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41,2),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65,5ㄱ),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84,5),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106,3),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이들의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112,1-­2),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걸은 이 모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128,1-­2). 성공이나 육신의 안위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불평 선언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긴 설교(5­7장)를 시작하시면서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를 외치십니다. 시편과 양식은 닮았으나 그 내용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비상하시다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벌 떼처럼 몰려든 군중에게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정작 여덟 가지 행복(八福)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과연 가능하기나 할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들이 직면한 현실 곧, ‘가난·슬픔·박해’ 등이 앞으로 그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를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버거워하며 짊어지고 살아온 위태위태한 삶의 방식이 바로 행복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쌓는 덕행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우리의 고달픈 현실에 그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기쁜 소식은 바로, 비록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거짓된 사악한 말을 듣지만(11절) 하늘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상은 크다는 약속입니다(12ㄴ절). 하느님은 복의 원천이십니다.

 
원고지 십여 장 채우는 것도 힘에 겨워 주말마다 백지와의 전쟁을 치르는 제 처지로서는, 여전히 ‘능력 있는 사람’, ‘시간 많아 여유 있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글쓰기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이상 그 능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도 아닐 터, ‘이렇게 말씀을 곱씹고 맛들이며 기도하다 보면 나에게도 성령의 영감이 찾아와 주시겠지, 그러다가 차차 시간도 단축되어 여유 있게 깊은 묵상 글을 나눌 수 있게 되겠지, 가끔 누군가는 허술한 내 나눔을 통해 마음이 열리겠지.’ 하며, 까마득히 멀리만 있어 보이는 행복을 지금 이 자리로 끌어당겨 봅니다. 불만스런 현실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새삼 깨달으며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니까, 지금 슬프니까, 의로움을 갈망하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하느님의 보상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질 것이라고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ㄱ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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