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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7일 목요일 설 - 양승국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07 조회수579 추천수7 반대(0) 신고
 

2월 7일 목요일 설 - 루카 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삶에 대해 Yes라고 대답하십시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 다시 말해서 가장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하는군요.


   부드러운 식빵 두서너 개,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담배 한 모금, 따뜻한 물로 샤워 한번 하는 것...


   수용소 생활이 막바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하루에 단 한번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감자들은 그 한 덩이의 딱딱하고 보잘 것 없는 빵을 어떤 방식으로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끝도 없는 논쟁을 벌였답니다.


   생각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한편은 빵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에 다 먹게 될 때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은 배급받은 빵을 여러 차례에 걸쳐 야금야금 나누어 먹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자는 수용소의 일상 안에서 이런 순간을 아주 큰 은총의 순간으로 여겼답니다.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기 전, 아주 짧게나마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이를 잡았습니다. 가끔씩 공습경보가 울리면 전등불이 꺼지곤 했는데, 그럴 경우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게 되고, 밤새 이의 공격으로 잠을 설치곤 했답니다.


   그래서 이 잡는 시간,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고 희미한 전등이 그나마 켜져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행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난 수감자들은 취사실로 들어가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는 데, 수감자들은 다들 요리사 F 앞으로 난 줄에 설 때 그렇게 다행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수프를 퍼주면서 그릇 내민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요리사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친구나 고향 사람들에게는 몇 알 안 되는 감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위에서 살짝 걷어낸 희멀건 국물만 주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공평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보니 행복이란 참으로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정말 행복해야할 사람이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하며 사는가 하면, 정말 행복할 구석이란 단 한군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이유는 비극 속에서도 낙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숱한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으라는 말씀은 불안초조해하며 있으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앞으로의 삶, 최대한 행복하게 만끽하며 지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사방이 온통 고통으로 둘러 쌓여있다 할지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기쁜 얼굴로 지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설을 맞아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과 한 자리에 앉아 계시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마음은 굴뚝같으나 홀로 고독을 씹으며 지내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우실까요? 얼마나 외로우실까요?


   그러나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시기 바랍니다.


   ‘아, 그래도 거기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은가?’ ‘그나마 나는 아직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시며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존재하는 한 희망이 있음을, 살아있는 한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그래서 끝까지 여유와 유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만 합니다. 부디 매일 다가오는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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