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 2008.2.8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08 조회수519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2.8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난다는 속담을 아실 겁니다.
 
또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1997년 겨울 IMF가 터져 참 어려웠던 시절,
사업상 어려움을 겪던 어느 분이 수도원을 방문했고
마침 남아있는 보신탕을 응접실에서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인정에 굶주리고 배고팠던 차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 후 그분은 사정이 풀려 지금은 잘 살게 되었고
그동안 우연히 수차례 만날 때마다
그 당시 먹었던 보신탕을 잊지 않고 고마워했습니다.

이게 바로 몸의 엄중한 현실입니다.
몸 없이는 사랑도 못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이미 하느님의 말씀에 앞서 몸의 빵이 전제되고 있음을 봅니다.
 
의식주의 몸의 현실이 안정되어야 영성생활도 가능합니다.
 
있는 중에 절약 절제의 자발적 가난은 기쁘게 선택할 수 있지만
없어서 겪는 몸의 궁핍은 참 힘듭니다.

사랑은 추상의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실천입니다.
의식주의 해결이 기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동시에 필히 뒤따랐던 것이 몸의 회복이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복음을 보십시오.
온통 병 고쳐주시고 배불리 먹여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여 주님의 별명도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이런 외적 신심행위나 단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습니다.
이런 외적 신심행위나 율법, 전례 넘어
몸과 직결된 삶의 현실을 직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살아있는 삶의 현실이 주님께는 최종 분별의 잣대였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망가지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주님이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다.”

마지못해 하시는 주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단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데 있습니다.
 
혼인잔치와도 같은 삶의 축제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순시기 적절한 때 단식이지
일 년 내내 늘 우울한 단식의 분위기라면 이는 삶에 대한 모독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창백한 금욕 수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웃 사랑 실천에 연결되는 자기희생의 단식이 아니라면,
단식 자체는 추호의 가치도 없습니다.
 
어느 어른이 언중유골(言中有骨)같은 말씀도 생각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오늘 2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통쾌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두가 구체적 몸의 현실과 관련된
자유와 정의,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는 말씀들이며,
이게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단식이라 하십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뒤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주십니다.

참 고마운 몸입니다.
몸 있어서 사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있는 하느님의 성전인 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주신 몸을 잘 가꾸고 돌보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좋으신 주님의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의 영육을 배불리시고 영육을 치유해주십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