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월 10일 야곱의 우물- 마태 4, 1-11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10 조회수445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 4,1-­11)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한참 성경 공부에 몰두하여 온갖 주석서와 논문을 뒤적이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때였습니다. 공부하는 맛에 그런대로 머리는 즐거운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찜찜한 게 석연치 않았습니다. 성경의 이 구절 저 대목을 빈틈없이 파헤쳐 분석하고 시대적 연관성과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따지다 보니, 내 어설픈 신앙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추상같은 하느님 말씀의 신비는 온데간데없을 뿐더러 교리 때 배운 ‘성령의 영감’은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내내 고민이었지요. 하느님 저자와 인간 저자의 절묘한 조합이 일궈낸 역작인 성경을 알량한 인간의 학문과 언어로 담아내기는 여러 가지로 역부족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악마와 한판 대결을 벌이시는 오늘 복음도 인간적 잣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본문에 속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곧장 광야로 향하십니다(1절). 사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그들이 호된 시험과 단련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난 장소입니다. 그들은 사십 년이라는 험난한 광야 여정을 거친 뒤에야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오죽하면 그들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순간순간 찾아드는 숱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제 발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과 성령께서 공동으로 벌이신 첫 과업은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들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십 일이나 단식으로 고행하신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3,17)을 악마가 그냥 봐주고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허기진 예수께 유혹자는 치사하게 빵으로 유혹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3절) 빵을 구실 삼아 굶주리는 백성을 먹여 살릴 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핑계로, 하느님의 아들 자격을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하라는 요구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도 시편까지 들먹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천사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받쳐주는지 증명해 보이라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하느님을 빙자한 오만함으로 믿음을 남용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시험해 보라고, 그것도 제 자존심과 독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광야의 시련이 웬 말이냐,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포기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8­-9절). 하느님의 계획과 악마의 계획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찬란하고 영광스럽다 해도 악마한테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혼을 악마에게 내맡기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려다가 자유도 잃고 사랑도 잃고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분은 생애 내내 도전을 받습니다. 광야의 유혹이라는 이 상징적 장면은 예수님이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세 번 다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신명 8,3) 하느님의 아들 신분은 배고픔과 갈증의 충족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진정한 양식이 되어줍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 신명 6,16)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내세워 기적을 남발하지 않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신명 6,13) 어떠한 목적에서건 악마와 야합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의 말씀대로 실천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의 세 유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시절 겪은 유혹과 통합니다.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은 자신들의 신앙이 참됨을 시련 속에서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광야에서 고행을 하시다니, 한낱 악마 나부랭이에게 시험을 당하시다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동참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온전히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시는 예수님의 소명 의지는 광야의 고행을 통해 더욱 확고해지셨습니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큰아들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는 싸움터’라고요.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를 마음에 담고 사는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마음 하나 간수하기도 참으로 버겁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의 신앙은 시험받습니다. 악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하여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특히 신앙인의 양심은 더욱 지키기 어렵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쉽게 대충 살아라, 이런 일쯤은 하느님도 봐주실 것이다, 고달플 게 뻔한 하느님의 길을 포기하라는 유혹은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만듭니다. 나약한 우리가 겪는 하찮으면서도 때로는 심각한 일상을 예수님도 광야 여정에서 겪으셨고 또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유혹자 앞에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가라.”(10절)고 당당히 외쳐보십시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혹을 받은 곳이 낙원으로 바뀌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우리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11절).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