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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 흉내내기 <16회>혼수상태에서 기도하신 어머니 - 박용식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7 조회수584 추천수5 반대(0) 신고
 

혼수상태에서 기도하신 어머니


            

   췌장암 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 깨어 보니 어머니께서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께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줄 알고 기뻐서 "어머니 괜찮으세요?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고 물어도 내 말에 대답은 않고 헛소리만 계속하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왕 헛소리를 하실 거면 기도로 헛소리를 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주님의 기도를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따라하시다가 혼자서 주님의 기도를 끝내고 성모송까지 마치셨다. 그런데 기도문 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기도를 끝내시더니 다시 혼수상태로 들어가셨다. 결국 혼수상태에서 헛소리 기도를 하신 것이다.


   '취중진담' (醉中眞談)이라는 말이 있다. 술 취했을 때 진실을 말한다는 뜻이다. 평소에는 감추고 있던 마음이 술기운을 빌려 드러날 때 하는 말이다. 잠꼬대도 마찬가지다. 깊은 관심사를 잠결에 말해 버리는 것이다. 잠꼬대에는 거짓이 없다. 꿈에 나타나는 것도 진실에 가깝다. 때로는 허무맹랑하고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평소에 품었던 마음이나 바라고 원하던 것들이 나타난다.


   치매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자기가 돌보는 치매 환자의 과거를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환자들의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엄은 물론 종교, 문화, 인간관계, 인간성, 사회적 인격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정상일 때는 감추고 숨겼던 그 사람의 비밀이, 그 사람의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난다고 한다. 치매에 걸린 어떤 신부님은 사제의 품위에 맞지 않는 욕을 해서 지켜보던 간병인을 실망시키기도 하고 치매에 걸린 어느 수녀님은 사탕이나 과자 등 먹을 것을 장롱 안의 이불 속에 감추어서 정상일 때 드러나지 않았던 약점을 드러낸 일도 있다고 한다. 신부 수녀도 이럴진대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건강할 때 잘 살아야 한다. 아무리 점잖은 척, 깨끗한 척하며 살았어도 속마음이 더러웠다면, 남몰래 더러운 짓을 했다면 치매에 걸렸을 때 여지없이 나타날 것이다. 아무도 치매가 안 걸린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지는 않으셨다. 89세의 노령에도 기도하느라 항상 머리를 써서인지 지극히 정상적이셨다. 그러나 당신의 본성이 드러날 기회가 생겼다. 혼수상태에서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중얼거릴 때 숨겨 왔던 당신의 본성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부끄러운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긴 드러날 나쁜 일을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히려 좋은 본성이 드러났다. 혼수상태에서 무의식중에도 기도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무의식중에서도 기도를 하실 수 있었을까? 그것은 평소의 삶이 기도하는 삶이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일생 동안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아파도 주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으셨다. 옛날에는 성당이 멀었기 때문에 미사 참례는 할 수 없었지만 주일을 거르신 적은 없다. 보통 주일에는 집에서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반드시 공소 예절을 하셨고 4대 축일에는 5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미사에 참석하셨다. 언젠가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 밤 물 길어 오시다가 발을 비어 한 발짝을 디디기도 힘든데도 다음날 50리 산골길을 걸어서 신림에 있는 용소막성당의 대축일 미사에 다녀오느라 큰 고생을 했다고 말해주셨다. 집에 왔더니 삔 발이 부어서 넓적다리만큼 커졌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 기도 (지금은 짧은 기도이지만 옛날에는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긴 기도를 거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밖에도 묵주기도는 물론 조상을 위한 기도, 자식을 위한 기도 등 기도란 기도는 모조리 바친 후에야 하루 일과를 끝내는 분이셨다.


   나는 집에 가면 언제나 어머니 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잔다.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며 편안하게 늦잠을 자고 싶지만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중얼중얼 소리 내어 하는 어머니의 기도 대문에 잠을 깨곤 했다. 이처럼 기도가 생활화된 분이라서 그런지 무의식중 헛소리를 하실 때도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평소에 기도가 몸에 밴 분은 헛소리를 해도 기도로 하시는가 보다.


   우리가 평소에 잘 살면 취중(醉中)에도 좋은 말을 할 수 있고 잠꼬대에서도, 꿈에서도 그리고 혼수상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치매가 걸린다 해도 부끄러운 치부(恥部)가 드러날까, 부끄러운 삶이 탄로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박용식 신부 수필집 / 예수님 흉내내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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