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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3일 야곱의 우물- 요한 4, 43-54 묵상/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3 조회수511 추천수5 반대(0) 신고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요한 4,43-­54)
 
 
 
 
◆모든 지식과 앎은 행동을 지향합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특정 분야의 지식에 한정된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의학·법학·신학 등에 대한 지식을 누릴 수 있는 이는 소수였고, 그러한 학문적 독점은 곧 사회·경제적 특권이나 전문적 권위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가 되고 지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단순히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특별한 지위나 존경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달라야 하는 점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왕실 관리는 아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렵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지식을 늘어놓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살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무언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것보다 더 큰일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은총을 받은 그 아이, 왕실 관리인의 아들은 과연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김영수 신부(광주대교구 청소년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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