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23) (수필2) 시간을 찾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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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정자 | 작성일2008-03-27 | 조회수624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제가 수필가로 입문하게 된 글 두 편을 소개합니다.
ㅡ초회추천작ㅡ
시간을 찾아서
유정자 / 柳靜子
며칠에 한 번 가던 뒷산을 요즘 들어 매일 올라간다.
한가해지기도 했거니와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 내 건강을 위해서다.
약수터가 있는 산을 두어 바퀴 돌며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 틈에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지난 오륙 년간 나로서는 참 힘들고 바쁘게 지내 온 시간이었다.
병치레가 잦은 아이들을 키우며 평생 살림만 하던 내가 갑자기 한꺼번에 여러가지 직책이란 걸 떠맡게 된 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였다.
몇 개의 기도회와 봉사 단체에 관여하면서 일주일 내내 나가야 하는 적도 많았다.
처음엔 열성으로 시작했고 보람도 있었으나 그런 생활이 오년 이상 지속되면서 서서히 지쳐갔다. 갈수록 체력이 달리면서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참석하여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하고, 약속을 지켜야 하는 상황들이 숨이 막힐 것처럼 힘들었다. 끝내 탈출하는 심정으로 모든 단체에서 탈퇴하고 교회도 일요일에 한 번 나가는 것으로 줄였다.
그랬더니 일주일이 길에 느껴지고 내 자신이 시간에서 해방된 듯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물론 집에서 살림만 할 적에도 시간에 매이지는 않았다.
분주하고 부대끼는 생활이긴 했어도 시간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은 늘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걸 몰랐다.
타의에 의한 시간 속에 갇혀 허덕이는 생활을 하고 보니 그 시절의 자유로웠음을 뒤늦게 알았을 뿐이다.
산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자 골짜기 아래 여기저기에서 떠드는 소리가 오늘따라 경쾌하게 울린다. 정자(亭子)나 벤치에 앉아 바둑을 두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공을 차는 사람, 이 기슭 저 기슭의 공터에서 윷을 노는 사람, 이 골짜기는 항상 그렇게 노는 사람들이 지르는 탄성으로 가득하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계절에 관계없이 여기저기 윷판을 벌리고 둘러서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한동안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대낮에 산속에서 하루 종일 그러고들 있을까 싶었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했다.
그런데 시간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유유자적하는 지금, 그들을 보는 시각이 변하는 걸 느낀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친근하고 활기차게 들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다.
분명한 건 직장에 매인 몸이라면 평일 대낮에 뒷산 기슭에서 윷이나 놀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물론 그중엔 바쁜 일과의 틈을 내어 휴식을 취하려고 들른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들은 지금 이 순간만은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히려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제 내 눈에 더 이상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자유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여유로움이 이제 나에게도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숲의 정기를 마시려고 심호흡도 하고 정자에 앉아 쉬기도 한다.
나무의 수액이 풍기는 듯 청신한 공기,
코끝을 스치는 풀 냄새,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음악처럼 즐겁다.
이렇듯 새삼스레 자연 속의 달콤함에 취함은 시간에서 놓여난 여유인가, 아니면 여유로움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았기 때문인가.
언젠가 어느 소설가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동안 마음속에 우물이 차올라 그 물을 퍼 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물도 두레박으로 푸기만 하면 흙탕물이 나올 것이므로 다시 맑은
물이 고이기 위해서는 우물을 비워야 했다."
그가 한때 시골집에 칩거하면서 3년 동안 글쓰기를 중단했던 일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 어쩌면 그는 숨차게 달려온 집필생활에 지쳐서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시간은 곧 금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따라서 시간을 허비함 없이 적절하고 유용하게 씀으로써 이루는 성취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시간에 얽매여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돌아가는 삶만이 꼭 가치 있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바쁘게 산 지난 오륙 년을 돌아보며, 그보다 몇 배 긴 세월 두서없이 되는 대로 살았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긴 세월을 빈틈없이 짜여진 시간표대로 살지 못했다 해서 헛된 것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가함이 낭비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지금 이 순간의 한유(閑裕)가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할 뿐이다. 이 한유함이 또 하나의 충전(充塡)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다시 새로운 시간을 찾아 나설 것이다. ㅡ끝 ㅡ
ㅡ완료추천작ㅡ
기원 (祈願)
글 : 유정자 / 柳靜子
새까만 새 두 마리가 문갑 위에 마주 서서 위를 쳐다보고 있다.
나비만큼 작은 그 새에 시선이 머물면 한껏 젖힌 부리와 목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절하게 간구하는 모습이어서 번번이 애틋한 감정에 빠지곤 한다.
얼마 전 충북 제천에 갔을 때, 차창 밖으로 이상한 광경이 보여 차를 세웠다.
야트막한 산비탈에 여기저기 긴 장대가 서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저마다 새 같은 것들이 얹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솟대임을 직감했다.
호젓한 그곳에 세워진 솟대는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신기해 보였다.
아주 옛날서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솟대를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본 적도 없고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십이 넘어 읽은 어느 시인의 시에서 솟대 끝에 매달린 볍씨 주머니가 바람에 달랑거린다는 구절을 읽고 막연하게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그러고는 몇 해 전 텔레비전 화면에서 솟대에 대해 방영하는 것을 잠깐 보았는데, 솟대란 기다란 장대 끝에 새 비슷한 조형물을 올려놓은 것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제천의 솟대공원에서 실제로 본 그것들은 조각가의 예술적 솜씨 때문인지 무척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였다.
마당 곳곳에 서 있는 장대 위에는 기러기 같기도 하고 뻐꾹새 같기도 한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새들이 올라앉아 있어 마치 새들의 왕국에 온 것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에는 박물관처럼 수많은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또는 여러 마리 새가 받침대 위에 서 있는 크고 작은 조형물들은 장식품으로 만든 것인 듯했다.
유난히 시선을 끈 것은 백 마리쯤은 될 것 같은, 나비보다 작은 새들이 가느다란 막대 끝에 올라앉아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작품이었다.
너무 예쁘고 앙증스러워 마치 옛 여인네가 머리에 쓰는 화관(花冠)에서 흔들리는 장식물을 보는 듯했다.
나지막한 옥상 위에도 수십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목을 젖히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군무(群舞)를 추다가 동작을 멈춘 발레리나들 같았다.
간절하게 기원을 하는 듯한 자세가 애절하게 느껴지는 건 긴 다리와 긴 목 때문인 듯싶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다리가 아니라 장대였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만 보일 뿐 인적이 드문 호젓한 산자락에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 새들이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날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새라서 그럴까. 살아 움직이는 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독과 절망 같은 안타까움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가슴이 찡해 옴을 느끼며, 하늘을 향해 기원하는 자세로 서 있는 솟대들 사이에서 나는 살아오는 동안 무슨 기원을 했나 헤아려 보았다.
백일해에 걸려 얼굴색이 새파래져 숨이 넘어가게 기침을 해 대는 아이를 안고 밤을 꼬박 새우던 일,
돌도 채 안된 어린 것이 홍역에 걸려 작은 팔과 손바닥으로 밤새 방바닥을 치며 열에 들떠 괴로워하던 기억,
친정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세상을 뜨시던 일,
이런 절박함에 부딪힐 적마다 애가 타는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내가 살아 온 지난 날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기원과 함께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신이든 우상이든 인간은 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의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날지 못하는 새에게까지 이렇듯 기원을 담아 하늘에 비는 것은 아닐까.
잔잔하게 흐르는 청풍 호수를 바로 밑에 두고 한껏 목을 젖히고 하늘을 향해 쓸쓸히 서 있는 솟대들을 뒤로한 채 돌아오는 발길이 왜 그리 애잔했는지 모른다.
그 감정은 외로움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여러 가지 마음의 빛깔들이 한데 뒤섞인 착잡한 것이었다.
오늘도 문갑 위의 새 두 마리는 위를 향해 한껏 목을 젖힌 애틋한 모습으로 내 시선을 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수많은 기원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솟대 위의 새처럼 간절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ㅡ 끝 ㅡ
ㅡ바로 전날 올렸던 게시물 (기원)에 달린 솟대그림과 꼬리글을 붙여넣기 합니다.
두 개의 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글도 붙여넣기 했습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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