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 해도 지극히 작은 일에도 큰 상처를 받고 그걸 견뎌내느라 늘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지냅니다. 비록 진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집사람이 “우리 이제 그만 살아요.” 하고 말하면 그 말 한마디에 저의 인생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를 용서하기 위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기를 기다리기엔 제 인생의 겨울이 너무나 깁니다. 비극을 하나의 축복으로 보기엔 제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나약합니다. 그런 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글픈 생각조차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상처받지 않는 삶을 아예 바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처에 제 인생 전체를 맡겨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상처 없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더 많은 상처가 생겨납니다. 살아가면서 상처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바다에 가지도 않고 바닷가를 거닐고 싶어 하는 것과 같고, 올라가지도 않고 산의 정상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상처 없는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상처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일에 남아 있는 인생의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기로 했습니다.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생 부정만 하다가 그나마 남은 인생을 다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부정하면 할수록 상처를 돌보고 긍정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 살아 숨쉬는 상처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연히 스스로 치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돌보듯 돌보야야 합니다. 내 상처를 스스로 엄마처럼 돌보야야 합니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상처를 돌보아줄 이가 없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돌보지 않으면 그 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처가 어디에서 왔건 어디에서 태어났건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상처가 현재 내 안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 움직이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상처는 어쩌면 지금 내 안에서 나를 해칠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 이미 해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칠게 분노의 뿌리를 내리고 잡초처럼 자라 내 삶을 폐허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가 돌보아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상처에 열심히 치유의 물을 주고 돌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철저하게 버려진 내 상처의 황폐한 텃밭을 가꾸려고 합니다. 풀을 뽑고 땅을 갈아 상추도 심고 토마토도 심으려고 합니다. 그 텃밭서 생산된 푸성귀를 먹도 다시 인생이라는 먼길을 걸으며 날마다 제 상처를 위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 분노의 열매를 맺지 않도록 어떠한 상처이든 제 가족으로 받아들여 안아주고 다독거리며 죽는 날까지 함께 살아가고자 합니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치유시켜줄 것으로 기대하거나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게 상처 준 자가 잘못했다고 사과해야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그때 비로소 내 상처가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입니다.
어떤 상처를 받든 그 상처의 궁극적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상처는 내가 돌보야야 합니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나만이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치유하지 않으면 상처는 곪아 터져서 걷잡을 수 없데 될 것입니다.
저는 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내 상처가 내 아들이다. 내가 낳은 내 아들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 아들의 어머니가 되고자 합니다. 그렇게 상처의 어머니가 되면 이세상 모든 어머니가 다 그렇듯이 저도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우면 한없는 사랑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텔레비전 프로 중에 자정 시간대에 방여하는 “병원24시”를 가끔 봅니다. 그중에서 어린이 환자가 나올 경우, 가능한한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합니다. 어린이 환자들이 자신의 병에서 오는 상처와 고통을 어른 환자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아프면서도 장난을 칩니다. 아파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든 웃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상처가 있는 이 어린이 환자들의 단순성과 긍정성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해야 상처가 밥이 되고 힙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긍정적이라야 상처에서 새로운 싹이 틉니다. 아무리 아파도 어린이 환자처럼 울다가 웃을 주 알아야 인내와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시 ‘갈대’에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상처는 스승이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스승’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상처는 스승이다
절벽 위에 뿌리는 내려라
뿌리 있는 쪽으로 나무는 잎을 떨군다
잎은 썩어 뿌리의 끝에 닿는다
나의 뿌리는 나의 절벽이어니
보라
내가 뿌리를 내린 절벽 위에
노란 애기똥풀이 서로 마주앉아 웃으며
똥을 누고 있다
나도 그 옆에 가 똥을 누며 웃음을 나눈다
너의 뿌리가 되기 위하여
예수의 못 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오늘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뿌리를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