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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02 조회수638 추천수5 반대(0) 신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 윤경재



 이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공관 복음서 세 편에 모두 실려 있는 비유입니다. 이는 초기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중요성을 깨달았기에 후대에게 전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20세기 초 성서학자들은 이 비유가 지나치게 알레고리(우화)처럼 쓰여 있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이 상상해서 쓴 우화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초기 공동체 교우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저자들이 작성했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알레고리로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았기에 그렇게 추측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47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우연히 꼽트 어로 쓰인 도마 복음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정말 우리 교회에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도마 복음서는 초기 교회에서 비록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 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114 개의 예수님 어록을 담은 도마 복음서는 단순하게 예수님 말씀만 적어 놓았기에 어떤 의미로는 네 복음서에 참고 문헌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전체적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를 연구하는 데 정말 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드립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도 도마 복음서 어록65에서 나타납니다. 이 말은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직접 언술하신 것이 증명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 복음서 내용과 세 공관 복음서 본문을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나타납니다. 참고로 도마 복음서 내용을 적어 봅니다.


“그가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한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경작자들에게 맡겨 그들도 거기에서 일하고 그가 그들로부터 열매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경작자들이 그에게 그 포도원의 열매를 주도록 그의 종을 보냈다. 그들은 그의 종을 잡아 때리고 그를 거의 죽게 만들었다. 그 종은 와서 그의 주인에게 말했다. 그의 주인은 말하기를 아마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종을 보냈다. 경작자들은 이 종도 때렸다. 다음에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는 말했다. 아마 그들은 내 아들을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포도원의 상속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경작자들은 그를 잡아 죽였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우선 내용이 극히 단순하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상황을 상정하면 보다 수긍이 가게 됩니다.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 말씀을 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귀로 들어 이해하기 편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듣는 군중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야지 쉽게 알아듣지, 전혀 낯선 내용을 이야기 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아마 예수님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갈릴래아 지방에 부재지주가 소유하던 농원이 많았는데 경작하던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강압적으로 농원을 탈취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외국인 지주의 지배와 과도한 착취에 항의해서 민족주의 운동을 빌미로 불의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도마 복음서 내용과 공관 복음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여러 부분에 가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숨은 의도를 그 정황을 잘 모르는 후세의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전달하려 애썼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복음서 저자들은 알레고리(우화) 용법을 채택하여 독자에게 교훈을 주려하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잡한 알레고리를 모두 삭제하고 직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가지고 단순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마 복음서에서 첫 번째로 “그것을 경작자들에게 맡겨 그들도 거기에서 일하고 그가 그들로부터 열매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라고 주인의 심정을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인이 자신의 이익을 꾀하여 소작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일거리 없는 소작인들에게 일하도록 배려한 점이 먼저입니다. 그런데도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떤 합당한 명분을 내세웠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자기들 소유가 아닌 재산을 강취한 것입니다. 전혀 합당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작인들이 종을 죽도록 때렸어도 주인은 그저 알아보지 못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량을 보인 것입니다. 주인은 두 번째로 종을 보내고 또다시 자기의 아들을 보내 주인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 소작인들의 양식에 처분을 맡깁니다. 그런데도 소작인들은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는 한마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삶을 누리며 살도록 장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인간들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헛된 짓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보충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고통이나 죄의 대가가 아니라 일거리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편입니다. 평생 일하지 않고 빈둥댄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겠습니까? 그 일거리를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못 마땅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아니면 노동을 독점해서 그 열매를 자기가 다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가 땀 흘려 얻었으니 자기만 독점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이와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소작인인 사람이 소출한 열매가 당신께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열매를 잡수시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열매를 팔아 더 큰 부자가 되고자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일해서 얻었다하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갖고 나머지는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주인에게 바치는 감사의 행동이며 합당한 처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낸 종들을 학대하고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고자 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고자 온갖 짓을 일삼는 인간의 처신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데에 아무 것도 이바지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것이 제 노력으로 얻어진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결실을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줄 모릅니다. 그 생명마저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결과는 비유 이후에 나오는 설명으로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겠습니다.



 

 


Tribute / Y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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