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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나라 - 토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0 조회수534 추천수3 반대(0) 신고
두 스님이 계셨는데 한 스님께서는 소문난 절에 계셨고 다른 한 스님께서는 알려지지 않은 절에 계셨습니다. 소문난 절에 계신 스님은 자신의 이름도 늘리 알려졌는데 작은 절에 계신 스님만은 그를 '비하' 했습니다. '그 스님은 소문난 절 때문에 그가 빛을 보는 것이다' 라고 늘 말했습니다. 한번은 작은 절에 계시는 스님께서 자신의 말이 시기와 질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승을 찾아 갔습니다. '우리 서로 절을 바꾸어 보세나' 고승은 선뜻 그렇게 하자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나는 세속으로 내려 가겠네' 고승은 절을 떠나 세속의 한 술집에서 마련해 준 곳에 거처를 정하고서는 여전히 수도에 증진했습니다. 소문난 절에 온 작은 스님은 첫 날부터 술을 즐겼습니다. 그 스님은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방문하는 손님들과 언제나 술을 함께 했습니다. 한편 고승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도 그 고승처럼 점점 달라져 갔습니다. 고승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참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고승이 계신 술집은 점차 '절간'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런데 소문난 절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고승의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반대로 술을 즐기며 인생을 탓하는 사람들만 찾아와서 그들이 어떤 때는 서로 술에 취해서 싸움이 벌어지고 마치 '절간'이 술집으로 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자신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 혹은 '성령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몸이 '육정의 집'으로 변하면 하느님의 성전'은 '욕망의 소굴'이 되지만 자신의 몸이 '하느님의 집'으로 변하면 '하느님의 성전'은 '성령의 성전'입니다. 자기 몸이 어디에 있던 자신의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 (성체,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면 그에게서는 깊은 '지혜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자기 몸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의지에 따라 자신의 '성전'이 진리를 어둡게 하는 육정의 소굴로 변하면 그에게서는 '진리의 반대'가 그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시며 하느님께서 생명으로 사람 안에 "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 이시며 세상에서 오는 지혜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오는 '하느님의 지혜' 이십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진리)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마음이 사실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고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지혜)가 없어 사람들은 '육정에서 난 아비'가 일러주는 대로 진리에 반대로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서 8, 37-38 참조>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8, 47>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람들 안에 생명의 양식으로, 마르지 않는 생수로 "내어 주시"려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어찌 자기 살을 남에게 줄 수 있느냐' 며 그리스도를 자기 속에다 받아 모시지 않고 도리어 돌을 집어 '지혜의 원천' 이신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떠나 가셨다" <요한복음서 8, 59> 누구든지 자기 머리(논리)에 의존해서 '나는 천박하다' 하여 자기 깊은 심연(마음) 안에 한없이 자비의 사랑을 베푸시는 -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머무르시지 않으며 예수님께 충만히 계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도 그 사람(그 성전)에게는 거하시지 못합니다.
 
세상과 타협한 자신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을 치려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먼저 자기 안에 모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 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그분의 육신(몸)이 높이 올려 졌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분임을 알아 보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주님'을 온전하게 모셔야 하늘로부터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의 성령'과 당신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집니다.
 
하느님의 '육'이 먼저 오고(강생육화) 다음에 하느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성령강림) 자기 안에 '말씀(지혜)의 육신'(그리스도의 몸)을 먼저 온전히 모셔야 다음에 '진리(말씀)의 영'이 오시어 사람 안에 온전히 거하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스님처럼 자기 안에 지혜를 갖추지 않고 자기 밖에서 지혜를 찾는다면 '절간'을 술집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지혜)를 모시지 않고 자기 밖에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육정의 소굴'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실 때 그리스도께 충만하신 '진리'(말씀,지혜)를 성령께서 드러 내십니다.
 
태초에 뱀은 사람이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했습니다. 사람은 온갖 것에 이름을 붙혔지만 하느님의 말씀(명령)만은 지켜야 했고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온갖 만물을 지배할 수는 있었지만 사람은 하느님의 명령(말씀)에는 순종해야 했기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완전한 지배자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래에서 사람 자신이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뱀은 인간의 그런 상태를 잘 간파하고 있었는데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뱀은 하와의 마음부터 유혹하여 제일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했습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말씀, 진리)이 벗어나길 시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여 인간이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등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난 후, 행동으로 까지 하느님과 멀어지도록 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처럼' 되게 거짓말로 유혹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자신이 '하느님 됨'을 명상하게 했습니다. '하느님 없이' 뱀의 거짓말에 의해 하느님을 명상하게 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 처럼' 되어진다고 확신하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명령)은 이제 자기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명상한 그런 '거짓 하느님이 된 자기'가 자신을 지배하며 자기에게 모두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말이기에 하느님(말씀)은 이제 자기 안에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본성>
 
입으로는 하느님을 알 수 있지만 행동으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죄와 죽음이었습니다. 한낱 먼지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뱀의 거짓말에 속아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오늘날에도 머리의 입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마음의 행동으로는 실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이시며 입으로만 나타내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입에만 있지 않고 행동에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명상의 말에 있지 않고 인간의 온 삶 안에 행동으로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전체 안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행동에서 떨어져 나와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 안으로 들어와 사람을 섬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참되신 모습이 무엇인지 영혼들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 육정의 욕망에서 나오는 교만과 불순종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오직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드러나시는 '참 하느님'을 뵙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같이' 명상되어지는 하느님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바 인간의 삶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신 그분의 의로움, 희생적인 사랑으로써 하느님이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사람을 섬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연민의 사랑이신 당신 (사랑의 고통)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 고통'까지도 구속하셨다. 죄와 죽음만을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통에도 동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인 고통을 자신에게서 멀리 두지 않으시고 직접 겪으심으로써 그 고통을 죄의 죽음과 함께 십자가에서 없애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만일 주님께서 인간적 고통을 피하셨다면 인간은 아직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고통의 육신을 열었습니다. 육신의 안락이 아니라 육신까지 여시어 고통과 일치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은 자선의 나눔을 초월하여 사람의 고통과 함께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에 예민해 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고통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먼저 예수님께 충만히 숨쉬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의 고통에 예민해 지며 깊이 사랑이 발출하시어 인간의 고통을 구속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이시니 고통을 보시고 사랑이 발출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육신이 열려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메마른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그리스도)이 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고통에 예민해 질 수 없으며 사람의 고통에 예민하지 않으면 죄악을 저지르기 쉽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죄에 민감(불감증이 아닌)해 집니다. 복음(말씀)의 실천적 행동이 그의 삶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사람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사람을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사랑)을 압니다.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참조> 죄악(뱀)은 사람(내) 안에 하느님께서 사시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주어진 것은 '작은 잔'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잔'이 당신께서 고난 당하실 당신 피의 '잔' 임을 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잔' 을 하느님께 청하였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는 잔' 이 아니라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셨던 순종의 잔이었습니다.

'사랑의 잔'은 자기 스스로 온 세상 사유의 그릇이 아니라 어린 양처럼 고난받고 죽으며 다시 살아나는 '예수님의 잔' 그대로 이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경외심에서 자신의 겸손과 함께 진실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에는 어두운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그 안은 맑고 순수한 하느님의 은총이 있으십니다. '사랑의 잔' 안에는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참 생명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영육의 치유는 스스로의 '사유' 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에서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작은 이'는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 끊임없는 자기 희생, 순수한 사랑으로서의 단순함 그 자체입니다. 복잡하게 사유하는 사람들은 그 단순함의 길에서 오히려 헤매이게 됩니다. 단순함이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인데 사유에만 멈추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유와 행동의 이중성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연결점을 찾으려 함으로써 더욱 복잡하게 얽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순한 이'는 우리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느님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자신이 자기 안에서 자꾸 커진다면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커진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받아 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열망은 하느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열망이 있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합일 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중성으로 자기가 자꾸 커진다면 '하느님 아닌 것' (우상)으로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당신을 내어 주셨지만 사람이 그분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밖으로 나가시면 인간은 비참해 지는 것 뿐입니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위해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는 가련한 이들에게 착한 목자의 성심이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결코 대중 위에 있는 인간의 허영심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가장 보잘것 없는 잃어버린 양 하나" 에게 예수님께서는 계십니다. 십자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숨 걸고 그 양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는 그와 같습니다. 사람들 마음 속의 '하느님의 성전'은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 마음 속의 '하느님의 집'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은 이중계명이 아니라 단일한 한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분리하였고 이 분리에서 가련한 사람들을 죄와 고통, 죽음 속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 결박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 '죽음의 힘' 아래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바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이미 죽은 행동이며 이미 죽은 행동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행동은 살아있는 그분의 행함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의 힘' 아래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복된 산 믿음은 확신에 가득찬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 겸손되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그 진정한 순수성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은총이 퍼져 나옵니다. 은총을 받는 가지가 이 은총을 '자기 것' (자기가 은총이신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것'이라고 하면서 따로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부터 잘려 나간 가지 처럼 말라 버릴 것입니다. 사람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하는 일은 (청하는) 아무것도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올려 집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획이셨습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지 않는다면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하느님을 망각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살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뱀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아직도 신음하는 사람들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직도 피를 흘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남은 십자가의 길을 우리 안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처럼 자신을 비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십자가 사랑의 길을 고난으로써 그분과 함께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그분께 있었기에 그리스도에게 고통과 고난이 뒤따르고 사랑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을 이긴 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고통이라서 고통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십자가에 아직 매달려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시어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세속적인 '고통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고난'을 말합니다.

"영혼이 지닌 사랑의 강도가 클수록 영혼은 더욱 깊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 ,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영혼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나, 고통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었든지, 아니든지 사랑의 성령이 영혼에 한번 닿기만 하면 성령은 즉시 그 영혼에 사랑의 상처를 낸다. 성령께서는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영혼에게 상처를 내신다.영혼을 기쁘게 해 주려는 원의가 큰 만큼 상처 또한 크고 영혼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준다." <십자가 성 요한 : '영혼의 노래' , '사랑의 산 불꽃' 에서>

마음이 깨끗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 자리에 하늘나라를 담을 수 있습니다. 거짓 신심은 자기 자애심만 높아져 하늘나라를 담아 내지 못하지만 참된 신심은 자기를 버리는 대신 하늘나라의 평화와 생명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은총이 없으면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이루지 못합니다.

자신을 가난한 마음으로 비우지 못하고 세상의 온갖 욕망(맛과 감흥)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에 자비의 하느님을, 사랑의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가면 다시또 내려 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보다 더 가난한 마음으로 아주 낮은 자신에게 내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세상 영광을 누리어 보려는 헛된 잠에서 깨어나 예수님과 함께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이 계시는 마굿간으로, 십자가에로, 부서지는 성체로 '내려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문입니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 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세상의 것들로 부터 가난할 수 있었기에' 하늘나라는 그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당신께서는 고통을 이기시는'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 고통을 이겼었다면 사람도 '이 사랑'으로 이길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고통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기는 하느님 당신의 '사랑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사랑의 숨결'은, 자선의 나눔에서 중단하지 않으며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까지도 함께 하게 됩니다.'완전한 사랑'은 주님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옛날의 죽을 몸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이기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육적인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수난 받으시고, 돌아 가시고, 묻히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 안에 모시어 영원한 생명의 몸이신 그리스도 몸(성체)의 지체로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그분께서 머무실 때 소용돌이치는 때로는 혼돈 속에 있는 삶 속에서 <사랑의 잃어버린 마음>을 자기 영혼에 하나로 모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완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내 몸으로 경험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믿고 체험으로 받아드립니다. 사랑하는 존재는 그의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존재이고, 용서하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된 생명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머물고 계신다는 '사실 현존'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며, 섬길 때에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사실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체험하는 사랑은 이미 나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행하시지 않으면 인간 의지와 힘만으로 사랑의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지팡이가 되심은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함입니다. 인간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하느님 영광)를 드러내시고자 함입니다.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 있는 그대로 -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인간이 영광 받는게 아니고 하느님께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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