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심리적 맹점>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3 조회수552 추천수6 반대(0) 신고
 
 
 
 

<심리적 맹점> ... 윤경재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 (마태 16,24-28)


  이 말씀은 인간 이해의 논리를 넘어선 말씀입니다. 본디 삶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입니다. 삶 자체는 깊은 의미에서 볼 때 비합리적입니다. 삶의 모습은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으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삶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이유는 “모순은 실제의 모습을 드러내는 척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이 지닌 모순에 닥쳐봐야 삶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실상 그 뜻은 깨닫지 못합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운 사건이 터져서 피부로 절감하기 전까지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심리적으로 ‘맹점(盲點)’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 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그 사물에 대해서만은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됩니다. 소리가 들려오고 되풀이해서 들리고, 우리로서 알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동화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체험하는 한에서만 사물을 알아듣고 나머지는 다 지나쳐 버립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남들에게서 그런 ‘심리적 맹점’ 경험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요? 실제 몸으로 체험하기 전까지 여간해서는 그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논리와 이성의 판단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헨리 뉴엔 신부가 지은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책을 읽어보면, 어린 시절 풍족한 가문에서 태어난 신부는 행복하기만 했던 고향 프랑스에서 떠나 장애인들로 이루어진 ‘새벽 공동체’의 지도신부로 일하게 됩니다. 부임해서 뉴엔 신부는 그 장애인들의 끔찍한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슬픔을 발견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맸던 슬픔,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던 슬픔, 무엇보다 하느님께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건만 자신의 큰 소망을 들어주지 않으셨다는 슬픔이 생각났습니다. 또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슬픔에 가득 찬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하느님, 우리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무 표정도 없는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근위축증을 앓는 빌은 항상 심박동기를 차고 다니며 인공호흡기를 통해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정신 질환을 앓는 수잔은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사실은 스무 명 되는 장애인들과 그들을 돌보는 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가 시간이 갈수록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정상인이라고 여겼던 신부와 봉사자들은 장애인들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자신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슬픔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자신들의 슬픔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트레이시는 손님이 오면 눈부신 미소로 맞이했으며, 다정다감한 그녀는 상대방이 개방적이고 섬세하며 다정한지 아닌지를 즉각 알아챘습니다. 그녀를 대하는 사람은 그녀의 얼굴을 통해 자신의 평소의 모습이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로레타는 자기보다 장애가 심한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어디에서 보다 새벽 공동체에서 커다란 고통을 맛보았고, 가장 많이 울고, 번민했지만, 이곳의 삶은 기쁨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작은 공동체에서만큼 그 자신을 잘 드러내는 곳도 없었습니다. 급한 성격과 분노, 좌절감과 우울을 들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뉴엔 신부는 이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슬픔이라고 생각하는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고 고향이며 친구들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지라면, 또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짓거나 한바탕 웃고 나면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기쁨은 어디에나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인간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빛나는 보석처럼 숨겨진 기쁨을 찾아낼 수 있다고 그 책에 썼습니다. 

  새벽 공동체에서 맞는 가장 큰 슬픔은 정들었던 봉사자들과 이별입니다. “왜 사람들은 모두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인가요?” 처음 장애우들에게서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뉴엔 신부도 달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이렇게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사랑을 주고받았던 봉사자들이 여러분에게서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기서 지내며 새롭게 얻었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자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즉 새벽 공동체는 사랑을 세상에 보내는 ‘사랑의 사관학교’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공동체에 와 계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이 공동체에 들어와 살아보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삶의 신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심리적 맹점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십니다.” 이 말씀을 뉴엔 신부와 봉사자들은 그곳에서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아픔으로 가득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근심하고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받으신 고통과 벌에 대하여 눈물과 내적인 벌을 간절히 구하라.”라고 말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베르나 山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신 고통을 자기도 느끼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영적 스승들은 자신의 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진 고통을 가져오는 ‘영적 어둔 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적 어둔 밤’을 통해서 모순처럼 보였던 삶의 신비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영적 스승과 신비가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경우 이 고통의 상태가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대신 고통 받겠다고 청원을 드린 관대한 봉헌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또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봉헌했는지 직관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면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