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나자렛 작은 마을에서 자라셨습니다. 농사도 짓고 양과 염소도 키우는 평범한 시골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그분 말씀에는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이 배여 있습니다. 특히 하늘나라를 소개하실 때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야 비유의 심오한 뜻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 청중들이 귀를 기울일 테니까요. 예수님께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내면에서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배에 앉아 말씀하시고 군중은 물가에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2절) 처음에는 제자들이 따르고 그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공생활 초반에 인기가 높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에 경탄한 나머지 여기까지 왔지만 모두가 그분한테서 사랑과 정의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뿌린 말씀의 씨앗은 그들 마음의 밭 어딘가에 떨어질 것입니다. 기름진 밭일지 삭막한 가시밭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ㄴ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씨를 뿌리고 나서 땅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뿌린 씨는 좋은 땅은 물론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도 떨어집니다. 이런 식의 씨 뿌리기는 태반이 헛수고입니다. 새들이 와서 쪼아 먹거나 해가 솟아오르자 말라버리고 무성한 가시덤불이 숨 막히게 합니다. 그러나 수확은 훌륭합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8절) 겉보기에는 이러한 농사법이 낭비로 보이지만 수확의 결과는 낭비를 능가합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결실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열매를 맺기만 한다면 하나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11절)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비유는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비유는 알려진 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아듣게 도와줍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절)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이해하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는 식별력이 주어집니다. 그분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예수님은 한 번씩 비정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돈이라는 현실을 하늘나라의 신비를 일깨우는 지식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곧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넉넉해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더 말씀에 굶주려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저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어려운 말이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인용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14ㄴ-15ㄱ절; 이사 6,9) 신앙의 귀와 눈을 열어준 예수님의 기적을 만방에 알릴지라도 정작 자신은 하늘나라의 말씀에 마음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 아래 있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16절)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18절) 앞의 비유 속 상징을 하나하나 우의적으로 해석해 주십니다. 씨가 마르코복음에서 ‘말씀’이고, 루카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면,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는 이러한 소소한 일상에서 따온 표상과 연결됩니다. 첫 말씀에서 씨 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씨앗과 씨앗을 받아들이는 토양에 중점을 둡니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은 말씀을 전하는 데 따르는 수많은 난관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듣기는 했으나 하늘나라의 깊은 의미를 자신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쉽게 악의 논리에 넘어가 말씀의 씨앗을 빼앗깁니다.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였다 해도 말씀이 돌밭에 떨어져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박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은 뿌리칠 수 없는 세상 이익의 달콤함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결실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다릅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23ㄴ절) 깨닫는 것,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열고 따르는 것입니다.
온갖 장애물에도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듯이 그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말씀의 열매를 맺습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결과는 놀라울 만큼 훌륭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만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결말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강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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