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Mt.11.25)
제1독서 이사야 10,5-7.13-16
복음 마태오 11,25-27
매주 화요일이면 저는 인천교구의 몇몇 신부님들과 자전거를 탑니다. 물론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매우 유쾌한 시간이지요. 그런데 요즘 계속해서 일이 생겨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다가 어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날씨까지도 도와주는지 해도 뜨지 않고 그렇게 덥지 않더군요. 그래서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손과 발을 가리는 긴 옷이 아닌 편안한 복장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지만 12시쯤 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해가 뜨지 않아서 좋았는데, 12시를 넘어서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 뜨거움이 상당한 것입니다. 저는 갈등을 했지요. 이대로 계속 탈 것인지, 아니면 폭염을 피해서 잠시 쉬면서 선크림을 바를 것인지……. 그러나 1시간 정도만 타면 오늘의 일정을 마치기 때문에,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생각으로 그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계속 탔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제 몸을 화끈화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한 여름 바닷가로 놀러갔다가 새까맣게 탄 모습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1시간 정도야 뭐…….’라는 안일한 생각이 저와 다른 신부님들을 벌써 피서 다녀온 사람의 모습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제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왔던 것 같습니다. 얄팍한 저의 지식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이야기하고 판단하는 저의 어리석음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모습을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네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에 노력을 하지요. 바로 인간적인 지식을 하느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신과 자기의 이익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기득권만을 도모하지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신과 미움,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자기가 못나고 아직 철부지이기 때문에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했기에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이 자기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철부지일까요?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지혜롭고 슬기로운 척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가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어린이 같은 철부지가 되면 어떨까요?
행복이 자리하는 곳(‘좋은 글’ 중에서)
현대는 물질 중심주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아픈 현실 속에서도 돈은 행복을 구하는데 최저의 가능성을 보장할 뿐이지 그것이 곧 행복과 맞바꾸어질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대리석의 방바닥이나 금을 박은 벽장식 속에서 행복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속에 행복이 자리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순수함이란 자그마한 일에도 크게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추운 날 애인으로부터 한아름의 제비꽃을 받고 감격할 줄 아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광고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이 한번 보내는 윙크로 깊은 안정감을 느끼는 아내의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또한 순수함이란 자존심이 사라진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푸른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을 사상 최대의 행복으로 느끼는 마음이 순수함이며 흙탕물에서 방죽 쌓기 놀이를 하다가 옷을 다 버리고도 기뻐하는 소박한 마음이 순수함입니다. 그래서 순수함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괴테가 지은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마한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처녀의 발에 밟혀 그만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은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녀석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꽃조차도 순수함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순수해야 합니다. 조건을 따짐은 흥정의 조건은 될 수 있어도 사랑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루에 백 번이라도 말할 수 있지만 사랑하느냐고는 한번이라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조건을 따지지도 않는 순수한 모습이 있을 때 그 안에 행복은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Stewart Dudley - Romantic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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