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17주일 / 조재형가브리엘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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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희상 | 작성일2008-07-26 | 조회수69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17주일 / 조재형가브리엘 시흥5동 성당 주임신부
휴가철에 고속도로는 장난이 아닙니다.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차량이 길게 늘어서서 오랜 시간을 차에서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빠른 시간에 막히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일까? 처음 가는 길은 이정표만 보고 찾아가기에는 힘이 듭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기도 하구요. 그럴 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옆에서 정확하게 길을 알려주면 좋겠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깨끗하게 풀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비게이션’입니다. 친절하게 목적지를 알려주기도 하고,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운전 중에 졸지 말라고 구수한 사투리로 안내해 주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편입니다. 차를 타고 길을 떠날 때, 내비게이션이면 충분하지만, 머나먼 인생길을 떠날 때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줄 내비게이션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많은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훌륭하게 경제를 살릴 것 같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경제를 살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고 하였지만 머슴이 되는 길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이끌어가는 것이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른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경제를 살리는 것보다, 오래 사는 것보다, 권력을 잡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이 청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아갈 수 없다.’는 속담처럼 하느님 나라를 알았다면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은행은 예금을 하면 이자를 줍니다. 더 많은 이자를 주는 은행이 있으면 우리는 기꺼이 은행을 옮길 것입니다. 매일 가는 음식점도 더 싸고 맛있는 음식점이 있으면 주저 없이 옮길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이렇게 지혜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인생의 길에 참된 위로와 희망을 주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요?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을 포기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양다리를 걸치는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동양에서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양다리를 걸쳐서는 더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며칠 전 책을 읽다가 교우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에 / 조재형가브리엘 신부님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만남을 이루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조금씩 금이 가고 그 틈새를 타고 불신과 오해가 흘러들어 옵니다.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과 미움, 원망과 분노가 쌓이곤 합니다. 수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을 했던 부부사이에도 미움이 생기곤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도 실망이 생기곤 합니다.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도 신뢰의 관계가 무너지면 힘든 일들이 생겨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과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상식과 양식이 무너지면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경제를 살리는 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것도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성공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오해와 불신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받아주지 못했고,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을 이집트로 팔아 버렸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다윗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배반의 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분노는 분노로는 풀 수 없고, 원망은 원망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분노는 사랑으로, 원망은 용서로 풀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찾아온 형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가족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사울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사울의 자식들을 보호하면서 신뢰를 회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찾아와 ‘평화’를 빌어주면서 용기를 주시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힘들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힘들다고 합니다. 나와 가족, 나와 이웃 사이에 흘러들어온 분노와 미움, 원망과 실망이 있다면 친절과 온유, 겸손과 사랑으로 녹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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